포틀랜드 여행 3
우리나라에는 정선 5일장, 제주 5일장, 김포 5일장 그리고 각 지역마다 열리는 5일장들이 있다. 구경만 해도 재밌을 것 같은 5일장에서 파는 싱싱한 해산물과 밭에서 수확한 야채들과 곡물들은 견물생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항상 가 보고 싶었지만 주말에 5일장이 열리는 곳을 찾아가기가 지금껏 쉽지 않아 글과 텔레비전을 통해서 간접 체험만 해왔다.
그런데 먼 미국, 멀고 먼 도시 포틀랜드에는 일주일마다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 여러 지역에서 열린다. OHSU에서는 화요일마다 열렸으며 어린 딸과 함께 나와서 팔고 있는 소박한 디저트 가게의 주인에게 쿠키와 달콤한 마카롱을 샀다. 멕시코 음식을 파는 곳은 OHSU직원들과 학생들의 점심 식사를 해결해 주는 곳처럼 바빴고 나도 옥수수 가루로 만든 독특한 음식을 딸과 함께 먹었다.
OHSU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은 병원 직원들과 교직원, 학생들, 환자 보호자들을 위한 작고 소박하고 아담한 규모라면 토요일마다 공원 같은 캠퍼스를 가진 포틀랜드 스테이트 대학교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은 마치 대학 축제 같은 분위기였으며 규모가 꽤 컸다. 가을,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리는 포틀랜드는 여름철 비가 내리지 않은 맑고 건조하고 상쾌한 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사람들이 주말 아침잠을 포기하면서 파머스 마켓으로 다 몰려온 듯 북적거렸다.
우리나라의 장날과 비슷한 분위기지만 파는 물건들은 확연히 달랐다. 그날 새벽에 갓 구워온 파이와 크루아상, 시나몬 롤을 파는 곳은 줄을 서야 했고, 커피를 파는 곳에선 내리쬐는 땡볕 속에서 20분 정도 줄을 선 후에야 커피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볼 수 있는 최신식 커피 기계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로 뜨거운 커피를 내리는 100년도 더 되어 보이는 커피 기계가 눈에 띄었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 설탕이나 우유를 넣지 않았음에도 부드럽고 달달한 맛을 내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맛있었다. 긴 줄은 이 집의 커피맛을 보증해주는 보증수표였으며 카페 분위기와 커피맛은 무조건 줄 서서 마셔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이다.
눈길을 돌리니 치즈와 버터를 파는 곳이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지역 축산 농가의 우유로 직접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시식을 하라고 버터 한 조각을 건네길래 빵없이 버터만 먹어봤다. 나의 혀에 닿는 순간 부드러움과 살살 녹는 버터맛은 빨리 빵에 발라먹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버터를 사놓고 버리는 일이 많았던 내가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버터는 소분해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변하지 않는다고 눈치 빠르게 말해주는 주인의 말을 듣고 군침을 삼키면서 치즈와 버터를 건네 받았다.
다른 가게로 걸어가다 보니 갓 수확한 체리가 바구니에 담겨져 진열대위에 있었다. 체리를 맛보고 싶다고 느낀 찰나에 가게 주인은 체리를 나에게 건넨다. 지금이 수확철이라 풋사과처럼 체리가 풋풋했다. 수줍음에 볼그레한 어린 아이의 통통한 볼처럼 생긴 체리는 이미 나의 지갑을 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한국에 갈 때까지 매일 먹기 위해 체리값을 지불했다.
걷다 보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고 때마침 멕시코 음식을 파는 곳이 나왔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뜨거운 부리토(Burrito)와 순한 커피로 아점을 먹고 나니 디저트가 먹고 싶어졌다. 아까 사놓은 시나몬 롤을 끄내 먹고 너트류, 오트밀, 과일주를 파는 가게들을 지나치면서 파머스 마켓을 빠져나왔다.
생기가 넘치고,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천막 아래 진열되어있는 신선한 상품들에서 시장에서만 받을 수 있는 기운을 받았다. 주인이 건네는 체리 하나에 이미 살 결심을 하고, 낯선 사람과의 짤막한 대화조차 즐겁기 이를 데 없었던 건 여행지에서만 느낄수 있는 경험이었다.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대학 앞에는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가 있다. 여기서 하버드 대학을 구경하기 위해 온 여행자와 보스턴에 사는 거주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차가 오지 않을 때 신호등이 빨간불이어도 건너는 사람들은 현지인들이고 초록불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은 보스턴에 놀러 온 관광객들이라는 것이다. 누군진 몰라도 재밌는 발견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해야 할 일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돌아볼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건 일상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신기해하며 빨간불인데도 건너는 현지인들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건 여행자의 관점이다. 나는 이번에 미국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이 아닌 여행자로 열흘을 보냈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경치-짙은 파란색의 넓은 하늘 바탕에 여러 모양으로 떠 있는 구름의 모양,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마운트 후드(Mt.Hood)-, 커다란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의 모습, 파머스 마켓에서 긴 줄을 서더라도 꼭 사야 했던 커피, 큰 이불을 세탁하기 위해 갔었던 셀프 빨래방(coin laundry)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모습들이 일상이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고 나에게 별다른 의미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낯선 곳에서 낯선 것들을 접하는 마음은 태어나 처음 접하는 모든 것에 신기함을 느끼는 아이처럼 만져보고, 맛보고, 가지고 싶었다. 나의 머리에 하나하나 각인이 되듯 남아있는 기억들은 여행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영하 작가의 말처럼 여행자는 노바디(nobody)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상에서의 나를 다 잊고 아무도 아닌 여행자로서 보고 듣고 느끼는 여정에서 또 다른 내가 웃고 떠들고 즐기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