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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B Sep 08. 2022

Good Doctor

달러 환율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코로나가 오기 직전 전국에서 서울로 동기들이 모이는 큰 행사가 있었다. 졸업 후 처음 보는 동기들도 있었기에 그동안 흐른 세월이 짧지 않았음을 서로의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모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어느 친구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왜 애들을 미국에 보냈냐고 물었다. 마치 대구에 살면서 왜 대학을 서울로 보냈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의대와 한의대에 아이들을 보낸 친구는 그날따라 더 의기양양해 보였다.


그 당시 나의 딸은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안갯속에서 길을 찾는 중이었고, 아들은 대학에서 금융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미국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느라 남편과 떨어져 7년을 지냈었다. 한때는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서 영원히 살리라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기러기 남편의 지원으로 미국에서 살아가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나 스스로 미국에서 아이들을 뒷바라지한 것에 보람을 느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7년이란 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나를 계발하고 업그레이드시키기에 필요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던 그 시기는 그보다 더 나은 환경을 찾기는 힘들었다.


아이들과 나 자신이 같이 성장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미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는 한국에 돌아왔는데, 친구로부터 왜 미국에 아이들을 보냈느냐는 질문에는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 깨달았다.


공부하는 법을 아이들은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배웠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길렀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한 의지와 노력이 있으면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최선을 다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과 한계에 부딪칠 수 있는 저돌적인 자세,  세계 어디에서 살든지 한국인의 정신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그 자리에서 친구가 아이들을 미국에는 왜 보냈냐고 하는 질문이 오늘 새삼 떠오르는 이유는 남편이 요사이 했을 법한 질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환율은 벌써 1,300원을 넘었고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오르고 있다. 의대에 다니는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기에 벅찰 수도 있는 남편은 혹시나 마음속으로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낸 걸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딸은 학자금 대출을 신청했다고 한다. 나의 마음이 무거우면서 저리고 쓰라린다. 왜냐하면 한의원을 개원할 때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그것 때문에 밤잠을 설친 적이 많은 나로선 생전 처음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산다는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학자금 대출을 한사코 말려돴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도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날들이 많았다.


학자금 대출이라는 게 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갚을 필요가 없지만 졸업 후 레지던트를 시작하면서부터 받는 적은 월급에서 대출금의 일정 부분을 갚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개원을 하거나 병원에서 일을 잡은 이후는 월급의 더 많은 비율로 수년간 갚아야 한다. 딸은 여태껏 자신을 돌봐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딸의 위로를 받은 후 나도 마음을 다 잡았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쓴맛과 함께 더 강해질 수 있으며, 돈이 주는 소중함과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젊은 피와 열정으로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good doctor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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