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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이 Aug 24. 2021

입추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ㅡ 23.08.21







1. 계절의 변화라는 것이 언제 어느 날짜에 딱 맞춰 일어난 적이 있었나, 변화라는 게 삶에서도 대개 예상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오듯이. 게다가 기온 이상으로 인해 사계절의 형태가 불투명해진지는 좀 되어서 내게 달력에 새겨진 ‘입추’라는 단어는 여전히 세게 내리쬐고 있는 햇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이 자주 보던 sns상에서의 ‘벌써 오늘부터 입추임 ㄷㄷ’ 라는 게시물과 자신의 친구들을 태그 하는 시끌벅적한 댓글들을 보고 별생각 없이 지나친 이유였다.



2. 실은 가을은 나를 잔뜩 웅크리게 만드는 계절이다. 무성했던 초록색의 생기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의 싱그러운 생명력을 계속 보고 싶은 아쉬움과 욕심 그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바람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신선한 느낌을 줬으나, 점점 진해지는 바람의 찬 기운이 머리카락을 타고 귀 옆으로 살랑일 때면 그것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모든 것은 죽어갑니다. 그럴 때면 나는 여름과 상반된 가을과 겨울의 모습이 시리게도 실감이 나서, 다가올 동면에 대한 숙연함으로 두 계절을 보냈다.



3. 애쓰는 하루를 보낸다. 눈을 뜨면 개운하지 않은 아침이 있었다. 오늘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궁리하다 보면 침대에서 내딛는 그 한 발이 두려워 도망가려는 내가 있었다. 결코 헛되게 보낸 하루가 아님에도 침대에 누우면 온 몸이, 온 마음이 나를 평온히 두는 것을 거부했다. 불편감에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내 몸을 때리는 일도 허다했다. 꽤나 마음에 들게 보낸 하루도 들여다보면 애쓰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던 순간의 조각들이 버젓이 남아있었기에, 하루를 보낸 것이 아닌 하루를 버텼다는 것이 금방 탄로 났다. 간신히 잠들어도 꿈에서는 수많은 문장들이 나타나 괴롭혔고, 몇 번을 깨기를 반복했다. 그걸 잠이 든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악몽에서 깨어나듯 눈이 번쩍 떠졌을 때에는 꿈에서 나타난 문장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아침이 되면 잊어버릴 것이 뻔한 문장들을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정답을 찾아 그곳으로 달아나야만 했으므로



4. 내게 입추는 그런 어리석은 하루들 , 입고 있는 여름 잠옷의 얇은  사이로 옅은 바람이 살갗에 스며들어왔을  찾아왔다. 그것은  그랬듯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변화,   드는 새벽에 끊임없이 애를 썼던 그런 어느 . 00:00ㅡ하루의 끝과 시작이 고요하게 맞물리는 깜깜한 시간, 바람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와 분홍색 커튼을 간지럽혀 희미한 웃음으로 커튼은 보답하고,  웃음에 전염되어버린  새벽. 다가올 일과 지나온 일에만 처절하게 몰두한 하루들이었다만, 지나갈 여름도 다가올 동면도 아닌, 지금  순간의 가을바람을 온전히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가을바람은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사랑했던 뜨거운 여름밤은 이렇게 지나갑니다, 순간을 붙들지 말아 주세요, 이제는 식힐 때입니다, 이제는 이별해야  때입니다, 죽음이 아닌 시작입니다, 괜찮습니다.



5. 그 어느 날에 입추에 나는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소멸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애써도 소멸되지 않았던 덩어리들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은, 그저 가을바람이 주는 분위기에 홀렸기 때문이었을까. ㅡ뭐든 의미 부여하는 좋아하는 나에게 그런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ㅡ 우리는 어떤 일을 망설이거나 기꺼이 행하지 않을 때 말한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상황에 따라 핑계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에도 때가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쉬이도 소멸된 덩어리들을 보며 생각했다. 애쓰고 애써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그저 아직 내게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그러니 애쓰기보다는, 지금의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심연 속에 헤맬지라도 다가올 나의 때는 그 어느 날의 입추처럼 계절이 변화되는 흐름에 따라 부드럽게 이어져 갈 테니.



6. 비와 함께 여름은 막을 내렸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가을의 찬 기운은 부끄러운 밤의 용서를 부추긴다. 옅은 바람은 나의 팔을 쓰다듬으며 불완전한 매일의 이별과 상실을 다정하게도 위로한다. 사람에게 앵겨오기 시작하는 따끈한 고양이와 이불로 파고드는 하나의 몸짓이 가져다주는 은은한 즐거움 속 무거움을 간신히 흘려보내며 나는, 계절과 함께 자라고 계절과 함께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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