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몇 년 전, 내가 살고 있는 구에서는 오래된 구청을 허물고 리모델링을 했다. 리모델링 전 구청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우선 건물 앞 자동차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주차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사이에 심어져 있는 나무는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어지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구청을 가리는데 한몫을 하여 구청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던 것 같다. 덕분에 지금은 기억을 해보려 애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는 회색 건물의 모양으로 간신히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20년을 넘게 한 자리에 살아온 나 또한 흔하디 흔한 회색 건물을 주의 깊게 보는 일은 없었고, 어느새 건물을 허물고 공사장이 되어버린 것을 보며 "아, 건물을 다시 짓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아,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높게 세워진 공사판을 보며 더더욱 칙칙해졌구나,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기도. 어찌 됐든 나에게는 보편적인 도시의 모양으로 다가와 그렇게 큰 의미도 기대도 없던 공사였다. 건물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러나 긴 시간에 걸쳐 끝난 리모델링 공사는 나에게 아주 큰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 하다 못해 특별날 것 없는 우리 구에 대한 자부심을 주었다. 주차장으로 쓰였던 곳은 잔디를 깔아 사람들이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앞마당이 되었고, 곳곳에는 넓은 벤치들이 생겨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며, 최근에는 대형 스크린까지 생겨 클래식 콘서트나 경기 중계 같은 특별한 영상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코로나의 여파로 산책이나 작은 나들이 정도밖에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옛날 옛적 코로나 시대 전에 사람들은 이 앞마당에서 돗자리를 펴 놓고 간단한 맥주를 마시거나, 주변 가게에서 음식을 포장해와 식사를 하기도 했다.
올해 폭설이 내린 날에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이 앞마당에 모여 눈사람 만들기를 하기도 했는데, 도대체가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있던 것인가 같은 의문을 느끼는 동시에, 이 작은 앞마당이 우리가 잊고 지내기 쉬운 어떠한 특별한 감정ㅡ눈사람에 대한 순수함과 쌓인 눈에 대한 설렘 같은ㅡ을 자극해주고, 각자 다른 모습을 한 우리를 같은 마음으로 한 곳에 모이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아무튼 그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더위 느끼기'를 좀 더 효과적으로 하고 싶은 날이었던 것 같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더위 속 마룻바닥에 누워 책을 읽던 나는 문득 이 구청 앞마당이 생각난 것이다. 창 밖에 보이는 저 넓고 푸른 하늘 밑에서 풀과 나무와 함께 바람을 맞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침 에어컨 기사님과 약속을 잡은 날이 다가와 나의 '더위 느끼기'도 막바지로 다가오던 참이었다. 해가 슬슬 질 시간이 오기까지 기다리다가, 읽고 있던 책을 챙겨 나온 뒤 며칠 전 친구에게 받은 기프티콘으로 얼음 음료를 구매하고는 그늘(아무리 '더위 느끼기'라고 해도 그늘은 중요하다.) 이 진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아싸, 왜 인지 오늘따라 사람도 별로 없다. 성공적인 '더위 느끼기'의 마무리가 될 것만 같았다.
벤치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한 지 2시간 즈음 지나자 구청 앞마당에는 가족 단위의 구민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구청에 어린이집이 있는지, 아니면 유아 관련 단기 프로그램을 하는 모양인지, 주로 유모차에 들어갈 만한 조그마한 아이들과 부모들이 구청에서 한 둘씩 나왔던 것이다. 책에 적당한 몰입을 하게 되었던 차라 나타나는 이들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뭐,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곧 아이들의 비눗방울의 시선을 빼앗겨 몰입은 깨지고 말았지만.
날아오는 비눗방울을 맨발로 톡톡 건드리며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을 때에, 누워 있는 내 눈앞으로 벤치만 한 키의 아이가 나타났다. 살짝 처져있는 눈썹을 가진, 뾰로통한 얼굴의 아이였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들고 있는 책 사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긴장감 넘치는 눈싸움을 하고 있던 차에 나는 ‘내가 졌다’를 선언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대답은 없었다. 들고 있던 비눗방울만 허공에 쏘고 있을 뿐 계속해서 멀뚱멀뚱 보는 것이다. 말도 아직 많이 때지 못한 모양이었는데, 도대체 나를 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미 없이 나를 쳐다보는 일이 많은, 집에 있는 내 고양이 깜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아이의 말을 들었다. "아니야!" 책 읽는 언니를 방해하면 안 된다며 아이의 손을 끄는 엄마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그날 그 아이 입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의 '언어'였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렇게 절실하게 표현했을지, 웃음이 난다.) 곁눈질로 나와 아이를 지켜보고 있던 앞마당의 사람들이 아이의 귀여운 반항에 두 손 두발을 들고 웃었다. 그렇게 아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언어에 우리는 개개인으로 존재했던 구청 앞마당에서 다 같이 연결되었다.
책을 덮고 사람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아이를 지켜보던 중에 또 다른 아이가 왔다. 아이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인사를 시키자 금세 친구가 된 두 아이는 '돌멩이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벤치 밑에 있는 큰 돌멩이들을 서로 옮기고 모으기 시작했는데, 무슨 놀이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돌멩이를 옮기는 과정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돌멩이를 주기도 하고, 들고 있는 돌멩이를 서로 뺏으려고도 하고, 뺏기지 않으려 버티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 돌멩이를 놓기도 하고. 어떠한 규칙도 없는 놀이를 아이들은 아장아장 걸으며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가끔 놀이가 막히는 것 같으면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의 말을 해석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런 추측들은 보기 좋게 빛나갔다. 생각을 한 문장으로 만들어 표현하고 상황을 이어가는 우리와는 달리, 아이들은 "아", "으", "애"라는 문장이라고 할 수 없는 짧은 음절만 뱉을 뿐, 비언어적 표현만으로 자신들만의 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저 귀엽게만 보이는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도 아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의사 표현을 하고 그 의도를 자연스럽게 읽으며 어떠한 언어나 문장이 없는 부드러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들끼리는 말없이 통하는 게 있는 걸까. 그건 새 하얀 구름 같은, 투명한 눈을 가진 아이들이 가진 특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말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가끔은 간절히 해명해야만 분명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ㅡ그것조차 분명한 마음인지, 잘 만들어진 문장인지 판단할 수 없는ㅡ 대화가 대부분이 된 나는, 돌멩이 놀이 속 쉽게 읽히지 않는 아이들의 대화와 마음이 궁금해져 한참을 쳐다봤다. 사랑스럽게, 그러나 조금은 뭉클하게.
말과 언어. 하나의 문장은 대화에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말에는 형태가 없어 뱉는 순간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가벼운 말은 무겁게, 무거운 말은 가볍게, 말을 해석하고 뱉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변질되어 때로는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의 언어로 표현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마음을 그대로 꺼내서 보여줄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서로의 마음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평생 내 기억을 따라다니는 나의 실패한 대화 속 지속되는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도해야 하는 우리의 언어적 대화는 참으로 아름답기도, 안타깝기도 하다. 돌멩이로 이루어지는 아이들의 계산 없는 대화를 보며 요 며칠간 느끼지 못했던 평온함을 느낀 건, 어떠한 언어적인 표현 없이 이어지는 마음의 대화를 갈망했던 나에게 필수적인 감정이었다.
누군가와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사람과 동물 중 하나 하고만 말을 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동물을 선택하겠다고. 나도 그에게 동의를 하며, 대화가 끝난 뒤 동물과 이야기하고 함께 지내는 상상을 하며 잠에 들었다. 더 나아가 동물과 어떠한 언어로 이루어진 대화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대화라면 더 좋겠다고도 생각을 한 것 같다.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말이 필요하지 않은, 말보다는 마음을 느끼는 데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대화를 하고 싶다고. 가끔 오해가 있어도 그 때문에 더 이해하고 더 사랑하는 나와 깜지처럼. 어떠한 문장도 없었던 아이들의 돌멩이 놀이를 보며 수많은 문장 속에 허우적거렸던 나의 모습과 그런 문장들 속 결국에는 어긋났던 우리들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 속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놀이가 끝나갈 무렵에, 읽고 있는 책 사이로 오랫동안 눈인사를 해줬던 아이가 나를 잠깐 쳐다보고는 옮기던 돌멩이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뒤늦게 온 아이도 그 아이를 따라서 가지고 있던 돌멩이를 건네주었다. 어찌나 사랑스러운 행동이었는지. 그건 선물이었다. 그건 그냥 아이들의 순수한 선의이자 마음이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왜 인지 창피해져 버렸다.
어느덧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 아이들의 반가운 방해 덕분에 남아버린 페이지의 대한 아쉬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밥때에 맞춰 아이들을 포함한 구청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한두 명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만이 남아있는, 다시 조용해진 구청 앞마당에서 나는 눈앞에 펼쳐진 하늘에 어울리는 노래를 들었다. 나에게 구청 앞마당에서의 더위 느끼기 기억을 좀 더 선명하게 선물해준 아이들에게 돌멩이를 보내는 상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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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조금 새드 앤딩이다 :
아이들이 각자 헤어질 때, 한 아이의 어머님은 아이에게 "책 읽는 이모한테 빨리 인사해~"라고 하셨고, 나는 아직 이모 아니라며 절규를 하며 헤어졌다. 후에 우리 어머니 가라사대, 너는 이제 이모가 맞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