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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이 Jul 15. 2022

시장

시간의 흐름이 훤히 보이는 곳


 이른 아침, 눈을 뜨고 점심까지 뒤척이다 보니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화려하고 다양한 배달 떡볶이가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런 옛날 떡볶이. 자연스럽게 동네에 있는 작은 시장이 생각났다. 



 나는 바로 어제 막 시작하려는 하나의 관계가 시들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지하상가 빈티지샵에서 산 만 오천 원짜리 여름 원피스를 입고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쓴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아파트 앞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봤다. 그 예쁜 얼굴의 작약의 주인이 1층 할아버지였구나. 꽃다발을 만들어가려 하시는지, 다른 종류의 작은 꽃들을 왼손에 들고 얼굴이 제일 커 보이는 작약을 꺾고 계셨다. 누군가의 사랑을 엿본 것 같았다.


 다시 발걸음을 떼고 시장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보이는 하늘이 맑고 예뻤다. 비슷한 시간에 친구 나영이에게 하늘이 예쁘다며 메시지가 왔고, 나는 그냥 힐끗 봤던 하늘을 고개를 들어 더 위로 쳐다봤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다시 보게 된 것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무려 300일이 지났어요. 작가님 글이 그립네요."라는 브런치의 알람이 처음에는 나를 조급하고 나를 미워하게 만들었으나 300일이 되는 시간 동안 나는 그것을 그냥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무뎌졌고, 들리지 않을 만큼 깊숙한 곳에 운둔하고 있었다.


 

 시장에 도착했다. (다른 시장은 모르겠다만,) 우리 동네의 작은 시장은 흔히 텔레비전에서 묘사되는 그리 정겨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진 않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하지도 않고, 무언가 무신경한 얼굴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시장을 살리겠다고 새로 달아놓은 상인들의 얼굴ㅡ그것도 세상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ㅡ이 그려져 있는 간판은 그런 분위기를 더 부각하는 듯했다.


 떡볶이는 시장의 거의 끝 쪽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나는 떡볶이를 사고 오는 길에 시장의 모습을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북적이지도 않고 하나의 유희 거리도 없는 시장을 나는 그냥 천천히 바라보고 싶었다. 앞서 말한 무언가 무신경한 얼굴들과 그들의 움직임, 상자에 써 놓은 글씨와 정갈히 배열되어있는 물건들을.


  내가 언급한 무신경한 얼굴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친절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냥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얼굴들이라고 꼭 설명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들. 누구의 시간도 아닌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그들의 무해한 무신경함.


 시장은 그런 시간의 흐름이 돋보이는 곳이라고 나는 오늘 시장을 걸어오며 생각했다. 안쪽까지 개방되어있는 가게로 가득 차 있는 시장은 상인들의 모든 움직임이 겉으로 드러난다. 떡을 찧는 모습, 물건을 배열하는 모습, 옆 가게 상인과 이야기하는 모습, 심지어 식사를 하거나 그냥 자리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쉬는 모습까지, 우리는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그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왜인지 나에게는 아무 일 없이 그저 시냇물처럼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의 조그마한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개인적인 시선으로 보면 결코 그 속도는 같지 않다. 누군가의 시간은 너무 빠르고 누군가의 시간은 너무 느리고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깊숙한 곳에서 멈춰있다.



 나는 바로 어제 이제 막 시작하려는 하나의 관계가 시들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허전함이 나를 지배했지만 그러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 아침이 왔고, 그러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 시장의 상인들은 어제와 같은 나날을 시작했다. 어제와 같이 물건을 정리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분주히 그들의 일을.. 그러나 시장의 상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어떻게 살아왔냐 물으면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당장 어제 그들이 사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어떻게 알리오.


 무언가 무신경한 얼굴과 움직임. 그건 우리의 모습과 같아서 시장 속에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던 나는 그들의 시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맑은 하늘과, 북적거리지 않는 시장의 고요함, 그리고 그 무신경한 얼굴의 무해함.




 어쩐지 나도 갑자기 불어왔던 바람에 시냇물에 혼자 떨어져 버린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게, 그들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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