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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25. 2024

정리 중입니다

나는야 프로정리왕

거실에 짐이 한가득이다. 네 짐 내 짐 할 것 없이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쌓아도 쌓아도 무너지지 않도록 균형 있게 올려놓긴 했으니 무질서 가운데 잡힌 질서의 모양이 그럴듯하다. 그가 쓰던 모니터를 버려야지, 컴퓨터 본체를 해체해서 버려야지, 그의 집에서 가져온 다리미를 버려야지, 우리가 연인이 되어 종지부를 찍은 그날까지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새것 그대로의 삼각대는 버려야 하나? 어차피 새 건데 당근에 팔아버릴까? 분명 누군가에겐 필요한 삼각대일 텐데 우리의 관계에도 삼각대가 있었다면 우리에게 이별이 이렇게까지 금방 덮치진 않았으려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저만치 늘어진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버린 머리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가슴 한편에는 미로가 더해져 어질어질하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니 온갖 필요 없는 전선뭉치들이 눈에 띈다. 아, 저 전선꾸러미도 이사 오기 전부터 꿍쳐두던 건데, 버려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기나긴 다짐 끝엔 포기하자며 나를 놓아버린다.


우리 집에선 내가 정리왕이었는데 프로정리왕이 이별을 겪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대다 가만히 잠자코 서 있다. 버릴 생각만 하고 버리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골똘히 생각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던데, 당장 지금! 롸잇나우! 저스트 두잇! 그게 바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최선의 방법이라던데, 이미 우리 관계는 성공시대를 지나왔기에 성공엔 도통 관심이 없다. 그저 이별 후에 떨어져 나간 그의 자리를 기억하고 싶어서 그의 물건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둔다. 그의 흔적이 그의 물건에 남아있다. 그의 냄새가 배어있고 그의 손때가 묻어있다. 물건마다 시선을 옮기면 그가 모습이 겹쳐지고 어김없이 그가 그리워진다. 매듭을 지었다고 끝이 났다고 이젠 정말 헤어진 게 맞다고 인정하다가도 여전히 그와 헤어지는 길목에 덩그러니 서있다. 미련이 많은 나라서 술에 취해 절절한 발라드를 찾고, 욕이 난무한 힙합을 듣고, 떠나간 사랑을 힐난하는 별의별 댄스곡의 음량을 키워도 별 해결이 안 된다. 코인노래방에서 목이 쉬도록 애창곡을, 신곡을, 갑자기 떠오른 노래를 아무리 목놓아 불러도, 울고불고해도 단 하나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이 해묵은 감정의 팽이 속에 몸을 맡긴 채 빙글빙글 돌아간다. 언제 튕겨져 나갈지도 모른 채 그저 그런 그냥 그런 나로 남아 굳어진다. 망부석이 왜 전설로 남았는지 알겠는 한심한 밤이다.


미련곰탱이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떠난 자를 말끔히 씻어내고 남아있는 나를 돌봐야 한다. 당면과제는 주어졌다. 그에 대해 곱씹는 걸 그만두는 일이다. 아무래도 냉동고 안에 그를 가둬야겠다. 자취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 집안일엔 도가 튼 줄 알았는데 그에게 유용했던 자취꿀팁은 음식물쓰레기를 전용봉투에 넣어 꼭 묶은 뒤 냉장고의 냉동칸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음식물쓰레기를 얼린다는 발상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삶에 들여놓은 이후로 나 또한 바쁘다는 핑계로 그가 하던 경악스러운 짓을 그대로 따라 하고 말았다. 하루는 TV 앞에 앉아 생생정보통 같이 일상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는 교양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음식물쓰레기를 냉동고에 넣으면 음식물쓰레기가 어는 동안 세균이 번식하여 냉동공간이 온통 세균으로 득실댄다고 했다. 나는 악어처럼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하며 이게 실화냐며 역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 하면 안 됐다고 툴툴댔다. 그에게는 배울 점이 많아서 따라 하고 싶은 구석이 많았는데 ㄱ부터 ㅎ까지 모든 걸 따라 하다간 인생 종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기가 어린 냉동칸에 얽힌 추억을 재생시키다 보니 이제 와서는 튼튼한 유리용기를 꺼내 그를 넣고 뚜껑을 꾹 닫아 그를 꽁꽁 얼려서 오래도록 보존하고 싶다. 실리카겔도 같이 넣어야 되나? 그가 아무리 삐져나오겠다고 아우성쳐도 입 다물라고 다그친 뒤 아무 말도, 아무것도 못 하게 꽁꽁 얼려두고 싶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다면 범죄자와 다를 바 없으니 상상에서 멈추도록 하고, 마음속 서랍에 냉동창고를 낑낑대며 들여놓는다. 그에게 형벌을 내린다. 그가 냉동창고에 들어서면 피부에 닿는 냉한 기운에 소름이 쫙 돋을 것이다. 이 냉동창고는 1초 만에 내용물이 꽝꽝 어는 스마트창고가 아니라 1982년에 생산된 연식이 오래된 냉동창고여서 사람이 들어온다면 엄지발가락 끝부터 서서히 냉기가 차오를 것이다. 그는 오직 그를 위해 제작한 전용 냉동창고에서 익스클루시브한 대접을 받으며 어는 중이다.




동요: 겨울바람 (출처:양말쌤)

https://youtu.be/LwNhvbet8pU?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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