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PLAN Sep 01. 2021

요강도 가져갈래?

초보플로리스트의 친환경꽃놀이

  몇 년 전 도배공사 때문에 엄마 장식장 속의 그릇들이 빨간 고무통에 담겨 있던 날. 

줄무늬 그릇을 애정 하는 나의 손에 들어온 빈티지 블루라인 접시들.

   "엄마, 이 접시들 다 가져간다."

말을 끝내자마자 신문지 찾아 돌돌 말아 크기가 각기 다른 접시들과 커피잔을 한 박스 들고 집으로 가져오니 명품 그릇이라도 손에 넣은 듯 뿌듯하다.


  큰 접시 하나와 커피잔 한 세트는 식빵 한 장, 아보카도, 사과, 계란 프라이 그리고  믹스커피를 늦은 아침으로 먹는 나의 최애 그릇 세트가 되어 주방 접시꽃이 맨 앞줄에 자리 잡고 있다.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화이트 바탕의 연파랑 줄무늬, 안정감을 주는 두툼한 두께의 밀크 그라스. 엄마가 오랜 시간 동안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셋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달달 커피를 타서 드셨던 사용감으로 색감이 살짝 변한 듯 하지만 돈 주고 사기도 쉽지 않은 내 스타일의 그릇들을 엄마 덕에 쉽게 내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만족스럽다.



   어렸을 적 고춧가루가 담긴 양념통으로 부엌 찬장 한쪽에 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 사기 단지.

오랜 시간 동안 냉장고 위에 살포시 놓인 채 쓰지 않으시는 듯하다. 뚜껑 한쪽이 조금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검은 점박이가 생겼지만 달항아리 꽃꽂이를 대신할 수 있는 훌륭한 화기가 되어 줄 것 같은 느낌이 팍 드는 날.

  "엄마, 이 단지 안 쓰시는 거지? 꽃 담으면 이쁠 것 같아 제가 가져가요."

  "그럼, 이것도 가져갈래?"

장식장 한 구석에서 꺼내 주시는 호리병과 컵.

술병인지 물병인지 헷갈리지만 나에게는 꽃병인 걸로.

 '아, 엄마에겐 이런 것도 있었지.' 어렸을 적 안방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유리 장식장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기억도 덤으로 떠오른다. 아버지가 사 오신 걸 내가 깨뜨려 몰래 다시 사다 놓으셨다는 후기를 들으며 포장하여 조심조심 옮겨와 내 장식장에 자리 잡는다.


  양재 꽃시장에서 제일 먼저 눈에 꽂힌 낙상홍 한 다발을 사 온 작년 11월의 첫 주 어느날.

긴 가지 정리 후 잔 가지들을 요리조리 조화롭게 넣어주니 따글따글 붉은 열매와 빛바랜 옛 느낌사기 단지의 어울림 속에는 가을볕의 따사로움과 낮은 기온의 청량함이 함께 있다.



  시골 꽃밭 한쪽에 무리 지어 피어 있던 핑크빛 코스모스와 백일홍들을 뚝뚝 잘라 온 작년 10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엄마가 챙겨주신 호리병이 생각나 장식장에서 꺼내 툭툭 꽂고 보니 하늘하늘 맑은 색감의 가을꽃과 짙은 와인 빛깔 유리병의 근사한 어울림이 맑은 가을날 하늘을 보고 있는 듯 기분까지 훈훈해진다.



  김치 담기가 취미이자 특기인 엄마 김치를 가지러 간 날.

 엄마의 간장병이 김치통 옆에 놓여 있다.

"저것도 가져갈래?"

 "좋지"

집에 있던 계란꽃 짧은 가지 길고 짧게 조화롭게 꽂아 주니 여행길에 만난 고즈넉한 옛집의 국화꽃에 둘러싸인 옛날 장독대 항아리들이 떠올라 맘이 여유로워진다.


 

   친정집 현관 들어서자마자 신발장 위에 연꽃이 그려진 작은 화분과 꽃그림 화병이 눈에 들어온 어느 날.

"엄마, 이 화분 하고 화병 안 쓰시는 거지요?

 다육이 심으면 이쁠 거 같아서 가져가고 싶어서요."

냉큼 가져다 다육이 옮겨 심어주니 줄기 아래에 새잎이 생기면서 옆으로 자리 넓혀 화분과 긴 줄기의 빈틈을 메워주며 안정감 있는 형태를 만들어간다

  선명한 달리아 꽃 몇 송이 있던 지난 여름날. 그림도 글도 바래어가는 화병에 넣어주었더니 빈티지한 화병과 쨍한 빛깔의 꽃색이 어우러져 여름의 끝자락인 듯 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운 여름날 엄마 꽃밭에서 물 먹고 잘 자란 풍선초와 설악초 몇 줄기 잘라온 날.

오래전에 주신 장식장 안쪽의 나무절구에 플라스틱 물통을 넣고 긴 줄기를 톡톡 잘라 사방으로 조화롭게 툭툭 걸쳐 놓으니 나무절구 사용감과 연둣빛 줄기, 아주 작은 하얀 꽃 그리고 빵빵한 풍선들의 어우러짐이 정물화를 그려놓은 듯 자연스럽다.



  오래된 물건들이고 지금은 돈 주고 사기도 어려운 것이어서 소중하지만 엄마의 오랜 세월이 묻어나 이야기가 있는 물건들이 되어 있어 나에게는 엄마의 옛 물건들이 참 소중하고 귀하다.


  나무절구에 담긴 풍선초 사진을 여러 장 보신 후 엄마의 말씀.


"스텐 절구도 있는데 그것도 가져가서 꽃 담아 써라.

그리고 요강도 있는데 가져갈래?"


옆에 있던 딸아이가 묻는다.

"요강을?"


작가의 이전글 제철음식처럼 제철꽃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