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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피 Jan 13. 2024

운동 도파민에서 빠져나오기

크로스핏을 그만두다

저는 청춘을 가져본 적도 써본 적도 없습니다.


어느 강의에서 들었던 슬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청춘을 가져봤고 써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CrossFit(이하 크로스핏) 운동을 도합 2년 넘게 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젊고 건강한 신체가 필요하다. 건강하기 위해 하는 운동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이 강해지기 위해 하는 운동이다.


10년도 전,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었던 군 시절, 잡지를 보다가 우연히 크로스핏을 접하게 됐고 죽기 전에 꼭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별다른 유니폼도 없이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손에 하얀 가루를 묻히고 밧줄을 타고 철봉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크로스핏을 그만둔 지금도 그 모습은 너무나 섹시하다. 크로스핏을 꼭 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은 전역 후 대학생활과 취업준비생 시절을 보낸 6년 후 현실이 되었다.


아무 생각없이 회사생활을 하다가 받은 건강검진에서 근육량이 낮고 체지방률이 높은 내 실체를 알게됐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검진 때의 인바디. 이후 이보다 더 악화되기도 했다

시즌 1. 내가 이렇게 약하다고?

무작정 동네에 있는 크로스핏 박스(크로스핏은 체육관이 아닌 박스라고 부른다)로 찾아가 친구와 무료체험을 한 후 3개월을 등록했다(친구는 1개월을 등록했다). 나름 운동신경이 좋다고 자만하면서 살아왔는데 보잘것없는 내 퍼포먼스에 실망함과 동시에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혼미했다. 우연히 만난 어린 시절 친구(운동에 젬병이던)는 잘만 하는데, 나는 왜 이리 힘들까. 눈물이 날 정도로 정말 힘들었다. 세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도였다. 군시절 유격훈련이 떠올랐다. 이런 훈련을 100번만 견디면 나는 인간병기가 되지 않을까. 미래의 내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모든 동작을 scale로 진행하면서 여자들과 같은 무게를 들었다. 나름 열심히는 하려고 했으나 당시 워커홀릭이었던 나는 의욕만큼 자주 운동하지 못했다. 야근, 출장 등으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아니 이는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무리하지 않은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초보일 때 무리하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시즌 2. 외롭다

이후 1년 여가 흐른 후 회사 근처에 있는 박스에 3개월 등록했다. 아무래도 회사 근처에 있어야 동선이 효율적으로 나온다. 너무나 강력한 사람들이 많았다. TV에 나온 유명인(일반인)도 한 명 있었다. 괴물 같아 보였다. 이 시기에도 제대로 된 동작을 수행하기는 힘들었지만 운동 후에 나오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재미있게 다녔다. 힘든 회사생활 내 정신을 잡아준 운동이다. 운동 후 씻고 집에 가는 기분이 너무 황홀하여 마약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운동을 했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이 오직 호르몬을 발생시키기 위해 기꺼이 외로운 길을 나섰다.

나에게 고통을 준 상사의 이름을 부르며 덤벨을 꾸역꾸역 들어 올렸다. 많이 부족했지만 체력이 조금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회원권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스트렝스 훈련을 하다가 두통이 팍 하고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던 나는 그 이후로 당분간 운동을 쉬었다.


시즌 2.5. 어쩌면 나 조금은 강할지도?

회사의 여름휴가 기간과 맞춰 시즌1에 운동했던 크로스핏 박스 10회권을 구매했다. 코로나 기간이라 선착순으로 예약하는 시스템이 상당히 불편했지만 초보자들이 많은 동네 크로스핏 박스에서 나름 괜찮은 퍼포먼스를 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적어도 체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우월감마저 느꼈던 것 같다(더닝크루거 효과다). 그러나 휴가가 끝난 후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져 다시금 운동을 쉬게 되었다. 시즌 2.5까지 나는 총 70번의 운동을 했다. 외형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시즌 3. 드디어 변화가 보이다.

시즌 3에는 PT와 Conditioning을 병행하기 위해 회사 근처 다른 박스에 등록했다. 처음 박스를 방문하여 무료체험을 했을 때 WOD(Workout of the Day)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내 뒤에 50대로 추정되는 아주머니 한분이 운동을 끝까지 마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PT 첫 시간 마주한 내 몸뚱어리는 이전 70번의 훈련이 무색하게 형편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때 이후로 나는 PT 30회, WOD 174번을 완료하며 장장 1년 반이 넘는 기간동안 꾸준히 운동을 나갔다. 강박적으로 나갔고 주말에는 헬스장에 등록하여 따로 운동을 했다. 아주 훌륭하지는 않아도 누가 봐도 운동하는 몸으로 변해있었고 내 정체성 또한 운동하는 사람이 되었 있었다. 그 사이 쓰로다운을 나가 내 실력을 겨뤄보기도 하고 박스 내에서 나름 퍼포먼스를 내기도 했다. 마지막 즈음에는 몇몇 WOD를 규정 무게인 Rx'd로 할 정도로 강해졌고 운동 욕심도 생겼다. 운동유튜브를 안 볼 날이 없을 정도로 운동에 빠져들었다.


크로스핏 마지막 날 인바디. 식단관리는 안 했다. 오히려 더 먹었다.


운동도파민에서 벗어나자

그러나 강해졌다고 생각할 때쯤 벽을 느꼈다. 동네 박스임에도 넘어설 수 없는 실력자들이 있었고 직장인인 나는 나보다 더 많은 운동량을 가져가는 그들을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신체가 타고나게 강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단지 어렸을 때 축구를 많이 해서 다른 사무직 대비해서 심폐가 조금 좋은 것처럼 느껴졌을 뿐. 강해지고 싶어서 더 열심히 운동할수록 내 몸은 더 힘들어졌다.

도파민이 분출되는 느낌이 예전처럼 강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운동에 중독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무감으로 운동했고 불안해서 운동했다. 운동을 하지 않은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 내 인생을 더 잘살기 위해 운동 도파민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이 다른 운동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남아있는 젊음을 수영, 러닝, 테니스, 골프 등을 배우고 훈련하면서 다양성을 높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회원권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까 그간 얼굴을 익혔던 사람들과도 마지막 날 간단히 인사만 하고 나왔다.


크로스핏을 은퇴(?)한 지 일주일. 이 기분을 남겨보고자 귀찮음을 무릅쓰고 글을 적는다.


크로스핏을 어떤 목적으로든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WOD를 250번 정도한 초급자의 입장에서 장단점을 정리해 본다.


- 장점: 짧은 기간 Conditioning을 통해 효과적으로 운동량을 가져갈 수 있다. 체지방이 빨리 탄다. 신체능력을 증가시키는 훈련이라 다른 운동에 있어서도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운동하는 게 힘이 된다. 코치가 있어서 매일 운동을 배울 수 있다. 운동이 매일 달라져 지루하지 않다.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느낌, 운동이 끝난 후 바닥에 쓰러지는 느낌이 썩 괜찮다. 평소 배우기 힘든 역도 동작을 배울 수 있다. 다양한 운동을 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엄청 재밌다.


- 단점: 의외로 몸변화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근육질의 몸매를 원한다면 보디빌딩식 고립운동을 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몸이 변한 것도 주말에 따로 헬스장을 다닌 덕분이다). 헬스장에 비해 비싸다(평균 월 15~20만 원 정도). 무리하다가 다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업시간이 정해져 있다. 운동량이 많아서인지 먹는양이 엄청나게 많아진다(근데도 쉽게 살이 찌지 않았다).


이 운동을 하면서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됐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선수들의 멘털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왕 할 거면 기간을 정하지 말고 딱 100번 나가본다는 생각으로 해봤으면 좋겠다.


크로스핏 최강자였던 Matt Fraiser, Source: British 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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