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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Milk Oct 08. 2023

(단편 소설) 조금은 아픈 이야기

5. SD Card

"세희야, 아빠 이것 좀 도와줘, 차량 블랙박스 SD카드인가 뭔가가 꽉 차면 지워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SD카드? 그거 컴퓨터 있어야 하는데.. 일단 카드 가지고 와봐요 아빠 내가 노트북 충전해 놓을게"


매주 방문하는 본가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거의 평생을 보낸 방도 오래된 거실도 그대로지만 무언가 공기가 새롭다. 오늘부터 시작될 긴 연휴에 맞춰 부모님을 방문했다. 이번 연휴는 내가 몇 달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다. 흐름이 끊기지 않고 푹 쉴 수도 있기 때문에 가까운 지역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했지만 그냥 집에서 엄마아빠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쉬고 싶었다. 


"SD카드 가져왔다. 노트북도 여기 있어 아빠가 충전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네.."

"알겠어 내가 할게"


몇 번이나 노트북 충전 방법과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드렸지만 여전히 기계 사용법이 서툰 아빠는 그래도 내가 몇 해 전 선물로 드린 태블릿 피씨는 잘 사용하고 계신다. 노트북을 충전해 놓고 내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우니 문득 눈에 들어오는 박스 하나가 있다. 어릴 적부터 사용하던 다양한 휴대폰과 스마트폰을 모아둔 박스다. 몇 해 전에 10대 때 쓰던 휴대폰을 충전도 해보고 안의 내용물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거의 20년도 더 된 전자 기기이다 보니 당연히 작동하지는 않았다. 이번에 다시 한번 더 시도한다고 해도 작동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호기심을 못 이기고 다시 시도해 본다. 그 와중에 오래된 mp3도 발견한다. 오래된 물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긴 하지만 전자 기기는 작동하지 않으면 원래 기능이 상실되어 가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적어도 오래된 물건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미학적 가치라던지, 제대로 작동한다던지, 지니고 다닐 수 있다던지, 이런 감성적 가치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어야지 계속해서 집안에 두고 추억할 가치가 있다. 다행히 오래된 mp3는 충전을 하니 제대로 작동했고 그때 그 시절 내가 즐겨 듣던 노래 목록을 보고 있자니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세희야 노트북 충전 다된 것 같은데?"

"아 으응.. 조금만 있다가 해줄게, 급한 거 아니지 아빠?"

"응응 급한 거 아니야 이번 연휴에 차 타고 나갈 일도 없을 거고.. 그냥 있는 동안에만 해주면 되는데, 부탁할게"

"알겠어"


10분이면 할 수 있는 일이니 조금 있다 해드려야겠다 생각하고 계속해서 예전 휴대폰을 뒤적거린다. 그러다 18살 즈음 일본 드라마와 일본 문화에 빠져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구매 했던 일본-한국 양국에서 공동 발매됐던 일본 브랜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휴대폰이 켜진일은 없었지만 괜스레 만지작 거리다가 배터리를 분해하는 휴대폰 안에 작은 외부 저장 칩이 들어있었다. 정식 용어는 모르겠지만 SD 카드 같이 휴대폰 용량이 초과되었을대 추가로 사용할 수 있는 용량의 카드인 듯했다. 자연스럽게 충전된 노트북에 SD카드를 삽입했다. 다행히 집에 작은 SD카드 어댑터가 있어서, 현재 가지고 있는 노트북과 연결이 가능했다. 그렇게 내 컴퓨터로 들어가 파일을 하나 한 살펴보다 보니 이 휴대폰을 사용할 당시에 듣던 노래 목록과 몇 장이 사진이 남아있었다. 약 12년 전에 찍힌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나의 모습은 애떘고 피부는 밝았고 순수하고 생기 넘치는 20대 초반의 보석 같은 모습이었다. 요즘에도 느끼는 것이지만 현재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고작 6개월 뒤에 현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그 6개월 뒤보단 젊고 밝은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랬다. 어릴 때 나의 눈은 쌍꺼풀이 없이 작았고 코는 너무 퍼져 있으며 피부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얼굴형도 옆으로 퍼져 있어 사진을 찍으면 얼굴이 크게 나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0년의 지난 후 20대의 내 얼굴을 보니 얼굴은 갸름했고 눈은 작지 않았으며 피부도 지금보다 깔끔했다. 지금도 가끔 거울을 보다 보면 피부가 늘어난 것 같고 눈도 처지는 것 같고 작년의 내 모습이 그립지만 언젠간 요즘의 내 모습을 보면 이 모습을 그리워 하리란 걸 알지만 여자의 욕심은 끝도 없다.


그렇게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그 시절 꽤나 가깝던 윤지의 사진이 있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해상도의 사진임에도 윤지의 모습은 뚜렷했고, 이 친구는 아주 밝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이 사진을 찍고 1년 정도 뒤에 윤지가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윤지의 모습과 우리의 추억에도 가슴이 먹먹하지 않은 건 윤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도 더 흘렀기 때문일까. 처음 몇 해는 술만 마시거나, 윤지와의 추억이 있는 날, 윤지가 세상을 떠난 날, 윤지의 태어난 날이 다가오면 큰 우울감과 함께 그리움과 상념에 빠져 지냈다. 죽음이란 건 평생 극복할 수도 이해할 수 도 없는 인간의 숙명이라지만, 특히나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이겨내는 건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사실 극복이라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 이들의 몫까지 사는 것 밖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던 여름의 날, 윤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많은 친구들과 가족을 두고 그렇게 이곳을 떠났다. 내가 25살이 되었을 때도 윤지는 여전히 21살이었고, 내가 30살 생일을 맞이한 날에도 윤지는 여전히 21살에 머물러 있었다. 나의 20대에는 윤지의 몫만큼 열심히 살 것이고, 가까운 사라믈에게 자존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 혹은 오기로 살았던 듯하다. 일종의 신념과도 같은 가르침이었다. 살아 있는 것과, 내 주변의 소중한 이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자. 그렇게 세월이 흘러 여전히 21살에 머물러 있는 윤지를 생각할 때면 그리움도 슬픔도 어떠한 감정도 남아있지 않는 걸 보면 윤지를 향한 어떠한 감정들이 소멸되고 그렇게 그의 기억은 언젠가 완전히 지워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부자연스러웠고, 어려웠고 서툴렀고 모든 게 아팠다. 

너의 21살은 사랑보단 이별이, 맑은 날 보다는 흐린 날이 많았나 보다. 


기억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마음을 흔들어도 이제는 좋았던 기억만 간직하며 웃어주고자 한다. 

우연히 찾아온 기억을 추억하며

안녕, 21살 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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