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의 기지 : 2026년판
원전(原典): 유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
재화(再話): 홍만종(洪萬宗) 『고금소총(古今笑叢)』
현대 세태 풍자판 재창작 (2026년)
검은 화면에서 걸려온 전화
2026년 5월의 어느 화요일 오전 열 시.
서울 도봉구(道峰區) 쌍문동(雙門洞) 빌라 이 층에 혼자 사는 칠순의 노파가 있었다. 이름은 한복순(韓福順), 나이 일흔두 살. 딸 하나가 경기도 일산(一山)에 살았고 아들 하나가 캐나다에 있었다. 남편은 팔 년 전에 먼저 갔다. 지금 한복순의 일상은 단출했다. 아침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거나 두부조림을 하고, 오전에는 동네 경로당(敬老堂)에 가거나 슈퍼마켓에 들르고, 오후에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유선 전화 수화기를 들고 딸 미진(美珍)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마트폰은 있었다. 이 년 전에 딸 미진이 사준 것이었다. 한복순은 그것으로 주로 전화를 받고 카카오톡으로 손녀 사진을 받아보았다. 다른 기능은 잘 몰랐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전 열 시, 한복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번호는 02-0000-0000이었다. 서울 번호였다. 한복순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민준이에요."
목소리가 손자 민준(旻俊)이었다. 한복순의 아들 재현(在賢)— 캐나다에 사는 그 아들— 의 아들이었다.
스물두 살. 열 살 때 캐나다로 건너가 지금은 대학을 다니는 아이였다. 일 년에 한 번 여름에 할머니 얼굴을 보러 왔다.
"민준이?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한국 왔어?"
"아니요, 할머니. 저 지금 한국에 왔는데 공항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목소리가 조금 불안했다. 그러나 분명히 민준이었다.
억양도, 말투도, 할머니를 부르는 방식도.
"무슨 문제?"
"할머니, 제가 짐 검사를 받다가 친구 부탁으로 가져온 물건이 문제가 됐어요. 친구가 제 짐에 몰래 뭘 넣은 것 같아서. 관세청(關稅廳)에서 삼백만 원을 내면 해결이 된다고 하는데, 제 카드가 외국 카드라 안 된대요.
할머니, 잠깐만 도와주시면 아버지한테 바로 알려서 갚아드릴게요. 아버지한테는 나중에 얘기할게요. 지금 당장 제가 너무 무서워서요."
한복순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준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할머니? 들려요? 빨리요, 담당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한복순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 잠깐만. 할머니가 지금 귀가 좀 안 들려서. 다시 한번만 얘기해봐."
"할머니, 삼백만 원이에요. 지금 바로 이 번호로 이체해주시면—"
"잠깐."
한복순이 말을 잘랐다.
"할머니가 하나 물어볼게. 민준이, 작년 여름에 한국 왔을 때 할머니 집에서 뭐 먹었는지 기억해?"
침묵이 잠깐 흘렀다.
"…갈비탕이요."
"갈비탕."
한복순은 그 대답을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민준이는 갈비탕을 먹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소고기 알레르기(allergy)가 있었다. 작년 여름에도 한복순은 민준이 때문에 닭개장을 끓였다. 민준은 할머니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국물이 소고기인지 먼저 물었다.
"그래, 그래. 갈비탕 맛있었지."
한복순이 태연하게 말했다.
"할머니, 근데 빨리요. 담당자가—"
"응, 그런데 할머니가 지금 통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어디 뒀는지. 잠깐만 찾아볼게."
"할머니, 이체는 스마트폰으로도—"
"할머니가 스마트폰 이체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 며칠 전에 미진이가 가르쳐줬는데 잊어버렸어. 잠깐만."
그녀는 전화를 손에 든 채 방에서 나왔다.
노파의 열다섯 분
한복순은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십 초쯤 지나서 말했다.
"거기 있어? 할머니 지금 통장 찾는 중이야. 근데 민준이, 작년 여름에 네가 좋아하는 음식 뭐라고 했었지? 할머니가 기억이 잘 안 나서."
상대가 잠깐 머뭇거렸다.
"…삼겹살이요."
"삼겹살. 맞아, 맞아."
틀렸다. 민준은 삼겹살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난 여름에 한복순에게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할머니 두부조림'이었다. 그것을 세 번이나 말했다. 할머니 두부조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통장 찾았어. 그런데 민준이, 혹시 네 아버지 전화번호 알아? 아버지한테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할머니, 아버지한테는 나중에 얘기해도 돼요. 지금 바쁘실 테니까."
"응, 근데 이 돈이 내 노후 자금이라 내 마음대로 막 쓸 수가 없어.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침묵.
"할머니, 그냥 제가 나중에 갚으면 되잖아요."
"아, 그래. 그런데 공항 담당자 분 이름이 뭐래? 할머니가 뭔가 이상할 것 같아서 나중에 확인해보려고."
"…김 모 씨요."
"김 모. 그렇구나. 그 분 소속이 관세청이라고 했지?"
"네."
"거기 대표번호가 뭐야? 할머니가 직접 확인해보게."
이번 침묵은 더 길었다.
한복순은 그 침묵 동안 조용히 텔레비전을 켰다. 오전 요리 프로그램이 나왔다. 생선조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할머니, 그냥 저 믿으시면 되는데."
"응, 믿지. 근데 할머니가 워낙 꼼꼼한 사람이라서."
"담당자 번호는 제가 잘 모르고, 어쨌든 지금 빨리 안 되면 제가 유치장에 가야 할 수도 있대요."
"유치장."
한복순이 그 말을 천천히 받았다.
"그래. 그럼 유치장 가 있어. 할머니가 미진이한테 전화해서 같이 가볼게. 미진이가 일산에 있으니까 한 시간이면 갈 거야. 공항 몇 번 게이트야?"
전화가 끊겼다.
한복순은 수화기를 내려다봤다. 화면에 '통화 종료'가 뜨고 시간이 표시됐다. 십오 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딸 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왜요?"
"아까 보이스피싱 전화 왔었어."
"뭐요? 엄마, 괜찮아요? 돈은요?"
"돈은 안 줬어."
"다행이다. 어떻게 했어요?"
한복순이 말했다.
"이것저것 물어봤지."
"어떻게요?"
"민준이 갈비탕 좋아하냐고 물어봤어."
미진이 잠깐 멈추더니 웃기 시작했다.
"엄마, 민준이 소고기 알레르기 있는 거 알고 물어본 거예요?"
"알지."
"어머니, 진짜 대단하다."
"대단하긴. 그냥 이상해서 물어본 거지."
AI 목소리의 시대
그날 오후, 한복순은 경로당(敬老堂)에 갔다. 오늘은 화요일이라 노인 복지관(福祉館) 직원이 와서 스마트폰 교육을 하는 날이었다. 담당자는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이름은 박준서(朴俊緖)였다.
한복순이 오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박준서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머니, 그거 딥페이크(deepfake) 보이스피싱이에요."
"딥페이크?"
"AI가 실제 사람 목소리를 학습해서 똑같이 만들어내는 기술이에요. 손자분 목소리를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SNS나 유튜브에 영상이 있었거나, 아니면 다른 경로로 목소리 샘플을 수집한 거예요. 요즘 목소리 몇 초짜리 샘플만 있어도 완벽하게 복제가 돼요."
경로당 안이 조용해졌다. 다른 어르신들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준이 목소리가 맞기는 했던 거야?"
"네. 진짜 민준 씨 목소리로 만든 거예요.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에요. 목소리가 진짜니까 '아, 손자구나' 하고 믿게 되는 거거든요."
한복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본 게 정말 잘하신 거예요. 보통 그 목소리를 들으면 그냥 믿어버리거든요."
경로당 안에 앉아 있던 육십대 후반의 권말순(權末順) 씨가 말했다.
"나는 그런 전화 오면 어떻게 하면 돼요?"
박준서가 말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라고 하고 끊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그 사람 번호로 직접 전화해보는 거고요. 사기범들은 항상 '빨리 해야 한다'고 해요. 왜냐하면 확인할 시간을 안 주려고."
"아이고, 그게 말처럼 쉽냐. 손자 목소리 들으면 가슴이 철렁하는데."
"그래서 피해가 생기는 거예요. 피싱범들이 딱 그 감정을 노리는 거거든요."
한복순이 말했다.
"나는 이상하다고 느꼈어. 민준이가 할머니한테 전화를 처음부터 너무 빨리 했거든. 평소에는 '할머니, 저 민준이야' 이렇게 시작하는데, 오늘은 그냥 바로 '민준이에요'라고 했어. 그 다음에 갈비탕 얘기 했을 때 확신이 됐지."
박준서가 메모를 했다.
"어머니, 그게 중요한 포인트예요. AI 목소리는 말투는 따라 하는데 그 사람만 아는 디테일은 모르거든요. 오늘 하신 것처럼 가족끼리만 아는 것을 물어보면 걸러낼 수 있어요. 우리 집만의 질문— '가족 암호(暗號)'를 미리 정해두시는 게 좋아요."
"가족 암호."
한복순이 그 말을 받았다.
"예를 들면 '이 전화가 진짜 나라면 우리 강아지 이름이 뭐야' 같은 거요. 아무리 AI가 목소리를 복제해도 그 집안의 내밀한 이야기는 모르니까."
그날 저녁, 한복순은 딸 미진, 아들 재현, 손자 민준 모두와 함께 영상통화를 했다. 재현은 캐나다에서 연결했다. 처음으로 네 식구가 동시에 얼굴을 봤다.
한복순이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민준이 화면 저쪽에서 얼굴이 하얗게 됐다.
"할머니, 제 목소리를 훔쳐간 거예요?"
"그런가봐."
"저 인스타그램 영상 내려야겠다."
"그래. 근데 민준이, 할머니 두부조림 좋아한다고 했잖아."
민준이 웃었다.
"맞아요, 할머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한복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알았지."
기지(機智)의 정체
다음 날 아침, 경로당에서 어제 일이 화제가 됐다. 권말순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복순 씨, 어제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대응했어요? 나는 손자 목소리 들리면 바로 돈 보낼 것 같던데."
한복순이 두부조림을 덜면서 말했다.
"뭐, 그냥 이상했어."
"어떻게 이상한 줄 알았어요?"
한복순이 잠깐 생각했다.
"민준이가 할머니한테 전화할 때는 항상 이렇게 해. '할머니, 나 밥 먹었어? 뭐 먹었어?' 이렇게 먼저 물어봐. 자기 얘기를 먼저 하는 아이가 아니야. 근데 그 전화는 처음부터 자기 얘기만 했거든."
"그걸 알아챘어요?"
"아이들을 오래 보면 알아.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권말순이 잠시 침묵했다.
"그게 기지(機智)네요."
"기지는 무슨. 할머니 노릇 한 거지."
경로당 안에 웃음이 번졌다.
그 주 금요일, 경로당에 구청 복지팀에서 나왔다. AI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을 하기 위해서였다. 담당 직원이 한복순의 사례를 발표 자료에 담았다. 물론 이름은 가렸다.
발표 자료의 제목은 이랬다.
「AI 목소리 복제 보이스피싱 대응법 — 칠십이 세 어르신의 기지에서 배운다」
핵심 대응 요령 세 가지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나. 갑자기 급한 상황을 만들면 일단 시간을 끈다.
둘. 그 사람만 아는 사실을 물어본다— '가족 암호'를 미리 정해둔다.
셋.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라고 하고 끊은 뒤 직접 그 번호로 건다.
담당 직원이 어르신들에게 물었다.
"이 방법을 처음 쓴 분이 이 자리에 계신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복순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일흔두 살 먹는 동안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러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게 뭔지 알게 되지."
"그게 어떤 느낌인가요?"
"빠른 것."
한복순이 말했다.
"세상에 정말로 급한 일은 별로 없어요. 진짜 급한 건 응급실 가는 거고, 진짜 위험한 건 불이 났을 때지. 그 외에 '빨리 해야 해, 지금 당장 해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대개 그 사람이 급한 거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담당 직원이 받아 적었다.
한복순은 그것을 보면서 두부조림을 한 점 집었다. 간이 딱 맞았다. 오늘도 잘 됐다.
홍만종(洪萬宗)은 고금소총(古今笑叢)에 이 이야기를 실으며 이렇게 썼다.
老婆機智(노파기지)— 노파의 기지라 함은 학문(學問)에서 온 것이 아니요, 젊음에서 온 것도 아니요, 기술(技術)에서 온 것도 아니다. 오직 오래 살아온 자만이 아는 것— 진짜 급한 일은 드물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아는 방법은 목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에 있다는 것. 2026년에도 機智(기지)는 첨단 기술보다 오래되고 느린 것에 있었다.
"AI가 목소리를 훔쳐도 두부조림 맛을 훔치지는 못한다. 그것이 사람이 기계보다 오래 살아남는 이유다."
(노파기지 발문(跋文) 정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