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나와 살고 있다.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두 달은 아니고 이 년, 삼 년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 재미로 지루한 줄 모르고 잘 지내고 있다. 그러나 와이프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 취미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 조금은 무료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옛날 솜씨가 근질근질했는지 꽃꽂이를 배워 보겠다고 하더니만 rice flower (쌀로 만든 케이크 꽃) 클래스에 등록을 했다. 첫 작품을 만들어 집에 들고 왔는데 너무 아름답고 생화 같이 보여 깜짝 놀랐다.
장미꽃이구나! 앙금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이걸 당신이 직접 만든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자세히 보세요. 이 꽃송이는 선생님이 만들었고, 나머지 꽃송이들은 제가 만들었답니다. 제가 만든 꽃은 꽃잎이 매끄럽지 않아요. 팔에 힘이 약해서 그렇답니다.
아니야, 당신 꽃이 더 생화같이 보여
선생님도 당신과 똑같이 얘기하던데
꽃 같은 여자가 꽃을 만드니 꽃이 더 살아날 수밖에-------
당신한테 이런 썰렁한 면도 있었어요?
나는 이 케이크 꽃을 먹지 말고 냉장고에 보관하자고 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케이크를 칼로 자른다는 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아서다. 마치 꽃밭에 예쁘게 피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꽃송이들을 짓밟는 기분 이라고나 할까? 그녀도 "당신이 먹기에 아깝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하시구려" 한다. 몇 주가 지나니 멸치볶음, 깍두기, 김치통으로 채워져 있던 냉장고 안이 데이지 Daisy, 프리지어 Freesia, 스카비오사 Scabiosa, 라넌큘러스 Ranunculus, 수국 Hydrangea 꽃으로 한가득 채워졌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냉장고 문을 열고 꽃들이 안녕하신지 들여다보곤 한다. 예전에는 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서 있으면 무엇을 찾느냐고 하더니만 이제는 아무 말도 않고 못 본 체한다. 역시 꽃이 좋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들은 나에게 "사랑(장미), 희망(데이지), 순결(프리지어)로 다가온다.
몇 주간의 Rice cake 클래스가 끝나자 이제는 명동성당에 꽃꽂이 클래스가 있다면서 그녀는 또 꽃을 찾아 나선다. 매주 금요일이면 와이프는 아침부터 바쁘다.
그녀의 꽃 사랑은 지극정성이다. 한국에서 지점토를 배울 때도, 미국에서 칼리지에 가서 세라믹 클래스를 택할 때도 그녀는 늘 꽃을 만들곤 했다. 아내에게 살갑지 못하고, 자상하지 못하고, 매력 이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이 그래도 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여행 중에는 보타닉가든 Botanic garden을 찾는 것도 이런 이유 에서다. 조그마한 뒤뜰이 있는 집으로 이사 온 후 그녀는 예쁜 꽃밭을 가꾸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다. 간밤에 뒤뜰 꽃밭에 머금고 있는 꽃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꽃대를 쳐다보며
"어머나 이 꽃 좀 봐,
어쩌면 이리도 예쁘니,
아유 행복해라, "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도 행복해하는 내 여인의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은 수업이 끝나면 명동성당 입구에서 만나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수업을 마치고 손에 들고 나온 꽃다발이 부피가 있고, 무게가 있어 보였다. 내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꽃다발을 넘겨받았다. 그러고 나니
@ 성당입구 계단 위에서 꽃을 들고 걸어 내려오는 남자가 될 줄이야.
@ 전철을 타기 위해 성당에서 명동역까지 오면서 사람들이 붐비는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꽃을 든 남자가
될 줄이야. 그것도 혼자가 아닌 한 여자와 함께.
시청 뒤편에 맛집을 찾았다. 식탁에 앉으면서 와이프 옆에 꽃다발을 놓았다.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종업원이 "꽃이 참으로 아름 답네요? 좋으시겠어요, 꽃다발도 받으시고". 뜻하지 않게 나는 와이프에게 꽃을 선사하는 착한 남자가 되었다. 종업원이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나 봐요?
끌쌔요. 딱히 그렇지는 않고요, 종종 꽃을 사주곤 한답니다"
이번에는 거짓말하는 남자가 되고 말았다. 와이프가 조용히, 지긋이 웃고 있다.
데이트를 마치고 귀갓길에 우리는 전철을 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어느덧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이 되고 말았다. 전철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만원이다. 나는 행여 꽃이 망가질세라 움켜쥐고 있는 꽃다발을 사람들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여기 꽃을 든 남자가 있어요" 외치는 듯 보였다.
꽃을 좋아하고, 꽃을 사랑하는 와이프와 함께 사노라니 오늘 하루는 성당에서, 명동에서, 지하철 안에서 꽃을 든 남자가 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