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20s Note Archive_01

December 17, 2016

by 이음서가의 빈 잔


글을 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굶다 굶다 곧 죽을 사람처럼 책을 읽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친구는 없었고, 꿈은 꺾였던 때였다. 나의 본질이 사라진 것 같았고, 내뱉는 말조차 내 것이 아닌 듯해 말없이 하루를 보낸 날이 잦았다. 나 자신은 이미 없는 사람이니, 보고 다닌 남의 것을 나의 것인 양 새벽마다 글을 쓰던 때가 있었다.


딱히 쓰고 싶었던 이야기도 없었고, 사명감을 느껴 써내야만 할 이야기도 없었다. 그저 그날 본 영화의 줄거리를 내 이야기인 양 적거나, 읽은 책 속 주인공에 동화되어 감정들을 적어 내려가곤 했다.

마담 보바리. 화양연화. 진주 귀고리 소녀. 정미경의 소설들.


온전한 나를 내비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혐오스럽고 가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냥저냥 하루를 최대한 허무하고 빠르게 보내려 노력했다. 미드를 보거나 쇼핑을 다니거나, 엄청나게 술을 마셔대거나 하며 시끌벅적한 모든 것을 따라다녔다. 혐오와 동경과 지루함으로.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이틀에 한 번꼴로 감정적인 글을 업로드하며, 사실 온전한 나를 적은 적은 없었다. 이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무언가를 모방하고, 또 모방하고 모방하다가, 우연히 재수 좋게, 노력한 것에 비해 값진 찬사를 듣고 싶었다. '한 번만 더 무언가에 진지했다가 실패하게 된다면, 난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난 누군가의 고유명사가 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단 한 명이라도 좋아.’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많이, 영원히 만나든 스쳐 지나가든 상관은 없었으나, 잊히기는 죽어도 싫었다. 내가 불릴 수많은 닉네임을 만들어내고, 상대방에게도 붙여주었다. 학교를 빠지고 미술관에 가고, 영화를 봤다. 상영관을 찾아 한 시간씩 전철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한 번도 집중해서 들어본 적 없는 논술 강사가 우연히 추천해 준 미학 책을 읽고, 용돈을 탈 때마다 전시회에 갔다. 도록이고 엽서고 닥치는 대로 사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책도 몇 권씩 사서 오곤 했다. 내 손에 잡히지 않으면 영원히 갖지 못할 것 같았다. 많은 것을 배우러 다녔지만 깊이 알려고 하진 않았고, 그다지 집중하지도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무언가가 상대방이 '운명'이라고 느낄 수 있는 우연이 되길 바랐다. 나는 기억되고 싶었고,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남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것을 흡입하고, 말을 뱉는 시점의 내 모습과 비슷한 것을 골라내서 모방하고 뱉어냈다. 사람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진 않았지만,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편지를 쓰고 책을 선물했다. 크리스피 도넛 봉투에 편지지를 넣고 봉하면 벼가 “아옹.” 하며 봉투 위에 앉아버리곤 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공허했으나, 억지로 그걸 메워버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우울하고, 그렇기에 특별하며, 이로 인해 무기력한 겨울 냄새나는 여자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기원] 글로 시간을 견디던 시절

제가 20대에 썼던 노트와 일기들을 다시 정리합니다. (회고나 현시점의 해설은 덧붙이지 않습니다.)

출판사를 시작하며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가’, ‘어떤 책을 만들어내고 싶은가’를 생각하다가 예전의 제 노트들이 떠올랐습니다. 기록은 언제나 결과보다 먼저 태어나니까요.


이 시리즈는 지금의 제가 출판을 시작하게 된 생각과 의지를 다지게 해주는 개인 아카이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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