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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만 Jul 30. 2021

<화가> Chapter_4  태엽시계

-소설-

Chapter_4  태엽시계 


아르누보 양식이 동판으로 몰딩된 육중한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오셨어요? 오늘 살롱에서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봐요"

"오~ 아끼는 리젤! 그래요 살롱에서 오래간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소. 그런데 늦은 시각까지 집에 안 가시고 어찌?. 자정이 훨씬 넘었는데"

취기가 올라 홍조를 띤 테오가 반가운 듯이 말을 했다.

"어머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몰랐어요. 이층에 테오, 작업실을 청소하다 옆 간이 공간에 가게 되었지 뭐예요...  거기에 물감, 도료, 캔버스 등이 조금 널브러져 있어서 하나 둘 정리하다가 보니 그만.."

"아.. 그랬군 거기까지 정리할 필요는 없는데.. 나, 참 부끄럽기도 하고 뭐 어쨌든 고맙소"

"뭘요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짧은 미소에 가지런한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이내 사라졌다.

햇빛에 잘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톤 그리고 그위 흐트러진 주근깨는 브르타뉴 해안 출신임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오년 전 집안의 마찰과 파리에 대한 동경에 무작정 상경한 씩씩한 여성이다. 낮에는 라 벨 자흐디니에서 노동자용 작업복이나 앞치마를 제작하는 미싱일을 하고 격일로는 저녁시간 테오 집에 방문하여 가사 일을 하는 것으로 부업을 하고 있다.

"리젤 오른쪽 손에.. 이걸로 닦으세요"

바랜 갈색 퍼프 슬리브 소매에 살짝 묻어 있는 초록 물감을 발견한 앙리는 가슴 포켓에서 격자무니 행커치프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런.. 칠칠치 못해서 그만.. 죄송해요"

"끼익~"

그때 현관문을 완전히 열어젖히고 이내 코라가 들어왔다.

"오랜만이네요 리젤~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지셨네요. 것보다.. 어차피 유화라 물감이라 그 행커치프는 크게 의미가 없을 거예요~ 오히려 행커치프도 못쓰게 될걸요?"

"코라.. 도 오셨군요?"

"네~ 테오로부터 살롱 작품전에 초대받았는데.. 여운이 아직 남아 한잔 더 하려고요"

코라가 현관 좌측에 서 있는 앙리의 눈을 한 번 응시하고는 그 시선을 리젤로 옮겼다. 반뼘정도 차이나는 신장 때문에 자연스레 내려다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코라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 행커치프도 값비싸 보이는데.. 물.. 들어 버리면 안 되니까... 그냥 다른 걸로 닦으면 돼요"

어색한 웃음기를 시작으로 왼손에 건네진 행커치프를 다시금 테오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아... 괜찮......"

그때 코라의 시선이 다시금 테오를 향했다. 그 시선을 의식하자 잠시 머뭇거리고는 행커치프를 받아 가슴 쪽 포켓으로 욱여넣었다.

그러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이 상황에서 살짝 미소를 머금은 코라

"리젤도 그럼 같이 한잔 하실래요?"

"아.. 아뇨 코라 저는.... 다만..  조금 피곤해서요 그럼 테오 모레에 다시 들릴게요.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테이블로 걸어가 베이지색 타이 포켓을 조심스레 주워 들고는 현관문 밖을 잰걸음으로 나갔다.

"리젤 그럼 조심히 가시고 다음에 또 봐요~"

그런 리젤의 모습을 본 코라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고 이내 거실에 있는 원형으로 펀칭된 케인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테오 더 마실수 있겠어요?"

"아.. 그럼 물론이지 지하저장소에 와인이 있을 거야 잠시 확인을 하고 챙겨 오겠소"

계단을 내려가는 테오의 뒷모습을 확인한 코라는 응접실 공간을 쓰윽 훑어보았다. 어둠 사이로 고전주의풍 명화가 여러 점 벽면에 걸려 있었고 화려한 회갈색 오크 장식 가구들이 비중 높게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면의 루이 필립 양식의 골든오크 선반 위에 놓인 빈티지 태엽 탁상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나오는 초침 소리가 규칙적으로 고요한 공간을 노크했다.


"째깍째깍"


"흐음.. 재미있네 시계 소리... 거슬릴 정도로 잘 들리는데?" 코라는 나지막이 흘렸다.



지하실에서 올라온 테오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하하.. 코라에게 권할만한 와인은 마땅히 없어서 쓸만한 건 이미 다 마셔버린 모양이오.. 아르마냑 브랜디는 어떻소?" 왼손에 농갈색 브랜디를 들고 그녀에게 흔들어 보였다.

"네 뭐.. 브랜디도 좋아해요"

응접실 오크 찬장에서 둥근 타일형 라로쉐 블로썸 글라스 잔을 두 개 꺼냈다. 그리고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브랜디 채운 뒤 코라에게 건넨다.

손으로 글라스를 감싸고 살짝 따뜻하게 데우자 살구향이 잔 안에 맴돌기 시작했다. 코라는 입에 닿기 전 간접조명에 비친 잔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잔에 먼지.. 하나 없네요? 꽤.. 만족스러우시겠어요 리젤이 가사 일을 열심히 해서"

"뭐.. 이전에 사람에 비해서야....."


코라는 브랜디를 한 모금 목 뒤로 넘겼다. 목젖으로 찰나의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저번에 비해 벽에 걸린 그림들 수가 더 많아진 것 같은데요?"

"맞아! 예리하구먼 코라... 저번에 왔을 때 비해 다섯 점 정도 더 늘었소. 요즘 미술작품 수집에도 크게 관심이 생겼는데 덕분에  내가 생각보다 상당히 소유욕이...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

그러면서 코라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코라는 테이블 위에 높인 글라스로 시선을 옮기며 잔의 양각 타일 장식 부위를 매만졌다.

"아.. 그랬군요.."

이내 테오는 본인이 앉은 케인 소파 뒤 그림들을 향해 상체를 돌리곤

"꽤 괜찮소 작업을 할 때 영감을 받는 레퍼런스도 되고 또 응접실에 이따금 방문하는 후원인들에게 관심을 받는 애들이 있으면 입양을 보내기도 하오. 허허.."

"한편으론 허전하시기도 하겠네요?"

"알 수 없소.. 아름다움 작품은 나만 소유하고 싶다는 이기심이 잔뜩 끓어오르다가도 한편으론 그 작품의 가치를 이해하고 열망이 있는 이에게는 또한 존경의 의미에서 내어주고 싶기도 하고.. 마치 양가적 감정이랄까?"

"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군요 테오.."

"뭐 분명한 건 내가 그 애들을 데리고 올 때보다는 더 가격을 높게 책정한다는 것이지 그래야 내가 작품에 들인 물질적, 감정적 시간에 대한 보상이 어느 정도 성립되니까"

"역시 당신은 확실한 사람이시네요.."

옅은 미소를 보이는 코라.. 그녀의 알 수 없는 미묘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테오는 계속 입을 뗐다.

"나도 화가이지만 가끔 주변의 화가들을 중 몇몇을 보고 있으면 답답할 때가 있어.. 그들의 욕구가 뭔지는 충분히 공감은 할 수 있지만 자기의 작품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자칫 나르시시즘이라는 구덩이를 파 본인과 함께 매몰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소.."

"그래요?"

"그렇소.. 파면 팔수록 더욱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쏟아부은 열정만큼 더욱 안락함을 느끼기에.. 저 멀리 입구에서 간절하게 불러도 되돌아오는 법이 없지... 더욱 슬픈 건 그 구덩이의 가장 아래에 금과 은 보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구덩이에다 스스로를 매립해 버릴 거야"

"슬픈 일이군요"

"세상의 주인공은 다른 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좀처럼 납득하지 않는다니까? 그래서 자기만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오. 고리타분함은 미덕이 아닌걸 빠르게 알아차려야 할 텐데.. 세상은 이미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사진기도 등장한 이 시점에서......"

아르마냑 브랜디를 다시금 잔에 기울이고 두 손으로 글라스를 포갰다. 살구향은 글라스를 채우고 있었고 둘 사이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째깍째깍"


고요함을 두드리는 방문객의 노크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듯했다.

"테오.. 태엽 시계가 참 멋지네요?"

"그렇소? 일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석했을 때 구입한 건데 사랑스러운 녀석이오.. 견문도 넓힐 겸 앙리에게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의뢰 작업한다면서 빼더라고.. 밉지만 선물로 줄까 생각 중이오.."

"아.. 앙리에게요?"


테오는 브랜디를 가볍게 스월링 한 후 입에 털어놓았다.



"시간은 어떤 이에겐 친구가 되고 또 어떤 이에겐 적이 되기도 하지... 어찌 되었건  앙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자산은 현재 "시간"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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