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Chapter_3 별이 빛나는 밤
-소설-
Chapter_3 별이 빛나는 밤
그 시절의 회상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찌르르 저려왔다. 앙리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음미하는 척하며 흐트러진 감정의 조각들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게끔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테이블에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코라를 향해 미소를 띠려 애썼다. 슬프게도 안면신경은 눈에 다다르지 못하고 겨우 입가에만 그쳤다. 부디 그녀가 그것을 읽지 못하길... 앙리는 바랬다.
"코라..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네 저야 뭐 잘 지냈죠"
화답에 곁든 싱그러운 미소는 삼 년 전 옹플레르 때 그대로다.
그녀는 들고 온 벨벳 소재의 금색 장식, 갈색 드로스트링 가방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두 분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와인을 한잔해도 될까요?"
적극적인 태도에 앙리가 머뭇거리며 별말을 하지 못하자 그것을 지켜본 테오는 너덜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당연히 환영이지! 남은 밤은 아직 길고 함께 보낼 사람이 늘수록 더 유쾌한 시간을 보내지 않겠나. 더욱이 코라이면.. 이봐 괜찮지 앙리?"
멈칫거리는 앙리 그리고 이 어색한 기류를 빠르게 파악한 코라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앙리에게 권유를 했다.
"오래간만에 와인이라.. 어떤것이 좋을까요? 앙리가 또 와인 애호가였잖아요.. 추천 좀 부탁드려요"
코라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앙리
"아.. 와인은"
"부르고뉴가 괜찮을 것 같은데? 봐봐 이 선홍색 빛깔 너무 예쁘지 않아? 무엇보다 오늘 코라의 드레스 컬러와도 아주 잘 어울리고 말이야"
테오가 앙리를 가로채곤 말했다.
코라는 테오를 흘깃 보곤 눈가의 웃음을 순간적으로 거두었다. 그리고 빠르게 다시금 앙리를 쳐다본 후 이내 미소를 띠웠다.
"앙리 지금 마시고 있는 것은 뭐예요?
"음.. 이건 생 줄리앙이에요 "
"그래요?"
"블랙커런트나 블랙베리 같은 검은 과실 맛에 비강으로는 오크향이 나는데 타닌은 꽤 많지만 대신 입안의 텍스쳐가 부드럽습니다. 이걸로 드시는 건 어때요?"
"어머나 그래요? 그럼 전 그걸로 할게요"
웨이터가 잔을 채워놓고 가자 코라는 새틴 재질의 레이스 소매를 거두었다. 이내 드러난 하얗고 긴 손, 그리고 그 손의 검지와 중지에 와인글라스를 끼워 조심스레 몇 번 돌렸다. 맛을 음미하려고 입술에 잔을 기울이자 약지에 끼워진 로즈골드 바탕의 루비반지가 앙리의 눈에 들어왔다. 살롱의 일렁이는 간접조명에 비추어진 루비는 유난히도 붉게 빛났다.
"………."
"음.. 괜찮네요 고마워요 앙리"
"뭘요~ 다행이네요"
멋쩍은 웃음
그들의 오래간만에 조우는 지난날의 추억을 땔감으로 살롱의 긴 밤을 밝혔다.
자정을 한참 넘긴 밤
취기 오른 앙리는 어둠 속 한산한 테르트르 광장을 지나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낯에 작가와 행인들로 번잡하던 원형 타일의 공간은 온데간데없고 침묵 속 고요한 공간만을 덩그러니 남겨놓았다. 몇몇 행인들이 그 공간을 가로질러 대화를 나누며 귀가하고 있다. 다소 시끄러운 대화의 조약돌은 감성의 우물에 떨어져 원치 않은 파동을 일으켰기에 잠시 멈춰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취가 사라질 동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퍽이나 밝군"
오늘따라 유독 별이 빛나는 밤이다.
파리의 밤하늘, 짙은 군청색 바탕에 드문드문 걸린 별빛은 강렬했지만 그 빛은 앙리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그런 별을 바라보며 너덜한 웃음을 짓던 그는 샹송을 흥얼거리며 골목 사이로 들어간다.
"삐걱삐걱"
오크나무의 계단을 지나 현관문이 닫기는 둔탁한 소리
테르트르 메인광장에서 세 블록 뒤에 자리한 이층의 작업실, 이젤 주위에 유화 작업을 위해 준비해둔 테르핀 기름의 향이 입구에서 나를 반겼다. 반려견의 대용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화가의 자질 자체는 이미 충분한 것 같다. 그 특유의 송진 냄새는 코끝을 지나 기분을 청아하게 하고 머릿속 찌꺼기를 배출해 준다. 때문에 작업에 임하기 앞서 심신을 정갈이 하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서 비치해 두었다.
체스터필드 코트를 우측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어둔 후 창틀로 향했다. 그리고 창틀에 팔을 기대어 시가를 물곤 별빛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뭐야 코라라니.. 오랜만이군... 하.. 그런데.. 그 세심한 배려가 더 잔인하다는 걸 알려나?...."
뒤돌아 거실로 돌아갔다. 새벽녘 밤공기는 실내를 여과 없이 관통해 스산함으로 채웠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곤 이젤 앞에 앉아 오전에 그리던 작품을 지켜보았다. 아직 초벌을 위해 그은 거친 붓의 궤적은 캔버스에서 발아하기 직전에 싹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좋아.."
그리고 붓을 꺼내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십여분이 지나도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붓은 목적지를 잃고 의미 없는 반복적 터치로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이것은 마치 발아하려던 싹 위에 다시금 흙을 덮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당위성만 존재할뿐 지금 이 순간은 헛헛할 뿐이다. 앙리에게 있어 올 한 해 가장 심란한 밤..
그럼에도 파리의 밤하늘 별은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