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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Jun 21. 2024

[장자13]제물론(10) 나비의 꿈

도(道)를 추구하되 나이롱 도사는 되지 말라!


[장자13] 제물론(10) 나비의 꿈 / 도(道)를 추구하되 나이롱 도사는 되지 말라!


논쟁이 되지 않음은


28. 나와 자네가 논쟁을 한다고 하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를 이기지 못했다면, 자네는 정말 옳고 나는 정말 그른 것인가?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옳고 자네는 정말 그른 것인가?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른 것인가? 두 쪽이 다 옳거나 두 쪽이 다 그른 경우는 없을까? 자네도 나도 알 수가 없으니 딴 사람들은 더욱 깜깜할 뿐이지. 누구에게 부탁해서 이를 판단하면 좋을까?


29. 자네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판단해 보라고 하면, 이미 자네 생각과 같으니, 그가 어찌 이를 옳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 바로 판단하게 한다면, 내 생각과 같으니, 그가 어찌 이를 판단할 수가 있겠는가? 자네와 다르고 나와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판단하게 한들 자네나 내 생각과 다르니, 그가 어찌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자네와 같고 나와도 같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판단하게 해도 이미 자네나 내 생각과 같으니, 그가 어찌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나나 자네, 다른 사람이 모두 다 알지 못할 노릇인데 누구를 더 기다려야 하겠는가?


30. 이처럼 변하기 쉬운 [시비 대립의] 소리에 기대하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네. 이런 것을 ‘하늘의 고름(天倪)’으로 조화시키고 ‘무한의 변화(曼衍)’에 내맡기는 것이 천수(天壽)를 다하는 길이지.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보통 ‘옳다, 옳지 않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하네. 그러나 옳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옳다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은 변론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런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논쟁할 여지가 없는 일 아닌가. 햇수가 더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옳다 그르다] 의미를 따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구경(究竟)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도록 하게.”



엷은 그림자와 본그림자


31. 망량(罔兩, 엷은 그림자)이 영(景, 본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그렇게 줏대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의존하는 그것 또한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오?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 아니겠소? 왜 그런지를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왜 안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나비의 꿈


32.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장자 제물론 28편부터 31편까지 장자는 계속해서 옳고 그름의 상대성의 ‘하나’ 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32편에서 그 유명한 ‘나비의 꿈’ 의 우화가 등장한다. 보아도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이기에 장자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


장주는 장자 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에서 -자 가 붙으면 선생님이라고 붙이는 존칭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자, 장자, 공자 등은 노선생님, 장선생님, 공선생님 등의 호칭이 된다. 그런데 본인을 등장시켰으니 스스로 장선생님이라고 하기보다는 장주라는 이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생략하고.


나비의 꿈 - 내가 나비인가 장주인가?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해서 토를 달 일은 없고 여기서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같은 이야기로 주제를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결국 나비의 꿈 이야기도 자기 존재 그 자체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자면 그저 현실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존재론적 의문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렇게 둘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세상은 도를 구하는 사람이라 하여 ‘구도자’ 라고 부른다.


며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도사(道士)’ 라고 소개하며 횡설수설하길래 적당히 응대 멘트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명상과 관련된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 데다가 심지어는 막무가내로 직접 찾아와서 도를 겨루어보자는 둥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인의 경우에도 ‘도나 기를 아십니까’ 하는 고정된 멘트를 날리며 길거리 포교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한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은어 중에 ‘나이롱’ 이라는 표현이 있다. 나이롱 신자, 나이롱 환자 등으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이롱은 다들 아시다시피 나이론(nylon) 이라는 유명한 합성섬유의 일본식 발음인데 천연(찐?)이 아닌 합성섬유임을 빗대어 쓰는 표현이다. 앞에서 자칭 도사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이롱 도사’ 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나이롱 신자, 나이롱 환자와 더불어 나이롱 도사들도 은근히 많다.


원래 도사라 하면 제대로 도를 닦는 중국 전통의 도교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마스터쯤 되어야 도사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가 별 건가? 세상 천지의 모든 사물, 사건, 현상의 배후의 근원에 상대성을 초월한 도(道)가 있을진대 무엇은 도이고 무엇은 도가 아닌가! 만물에 불성이 있다, 만물의 작용이 신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내가 특별한 사람입네 하는 아이덴티티를 덮어 쓰고 도사라고 내세우는 그는 정말로 나이롱 도사가 아닌가!


이전의 글에서 필자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경험에 대해 언급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름의 답을 얻은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언어도단이며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기에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에서의 ‘나’는 근원의 도의 영역에 해당되는 자신이기에 이에 대한 해답은 언어로 풀어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 붓다의 설법을 빌려서 살펴보자. 붓다는 우리 존재인 몸과 마음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가지로 나누어서 보았는데 색은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고 나머지 수상행식(느낌, 인식, 심리작용/의도, 의식)은 마음을 네 가지로 나누어 본 것이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오온 혹은 다섯 가지 덩어리들의 집합이라고 하여 오취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또 다른 붓다의 유명한 설법 중에 삼법인(三法印) 이라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세 가지 현상적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흔히 무상(無常 - 항상 그대로인 것은 없다), 고(苦 - 괴로움, 본래는 불만족성을 뜻한다), 무아(無我) 이다. 이 중에서 현재 전개하는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무아에 대해 약간은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무아는 글자 그대로만 보면 <‘나’ 가 없다> 라는 뜻으로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붓다께서 직접 하신 설법 중에 앞뒤 맥락을 함께 살펴보면 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게 된다. 붓다께서 원래 설법하셨던 언어인 빨리어로 기록된 초기경전을 살펴보면 (참고로 빨리어는 글자는 없이 소리로만 구성된 언어이기에 다른 글자로 음사되어 적혀있는 상태다) 무아의 원래 기록은 anatta 이다. atta는 참나 라는 뜻이며 산스크리트어로는 atman으로 쓰인다. 아트만이라는 표현은 ‘참나’라는 의미로, 이런 방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끔 들어보았을 단어일 것이다. 아무튼 빨리어 접두사 an-은 한자로 무無로 번역되었고 atta는 나(我)라고 번역되어서 무아無我가 되었다.


그런데 앞에 언급한 대로 설법 내용을 상세히 들여다보면 ‘오온은 참나가 아니다’ 로 귀결된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인 색은 나 아니며, 마음을 구성하는 느낌(受)도 나 아니며, 인식(想)도 나 아니며, 심리작용(行)도 나 아니며, 의식(識)도 나 아니다. 혹은 한자 번역 그대로 대입해도 색수상행식 그 어떤 구성요소 안을 뒤져보아도 ‘나’ 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색수상행식 오온, 몸과 마음 모두를 다 뒤져도 ‘참나’ 든 ‘나’ 든 그것이 없기 때문에 정말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아 무아 하듯이 정말 그런 것인가? 하면 또 그렇지가 않다.


삼법인은 무상, 고, 무아라 하였다.

부처님 설법 중에 이런 내용이 자주 반복된다.


(붓다) 비구들이여! 이것(그것이 무엇이든)은 항상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인가?

(비구)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성되고 소멸되는 무상한 것입니다.

(붓다)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행복한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비구)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붓다) 무상한 것이기에 색수상행식 존재의 요소들은 실체(참나)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비구) 아닙니다.


무상은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진술이 안 될 수도 있는데 그 앞에 두 글자가 더 있어야 한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온 내용이다. 그것은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諸行) 이란 모든 형성된 것이라는 뜻이다 - 한자 행行은 다닐 행이 아닌 형성(빨리어 sankhara)이라는 의미로 문맥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즉 제행무상이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는 뜻이고 뒤집어 보면 ‘형성되지 않은 것은 무상하지 않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 형성되기 이전의 것은 무상하지 않다.


감히 주장하지만 - 물론 필자만의 주장인 것은 아니다 - 참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붓다께서는 ‘형성되지 않은 불사(不死)의 세계가 있다’ 라는 표현을 반복하셨으며 이것은 대승불교의 일부 종파에서 말하는 영원히 존재하는 극락세계, 아미타불의 서방정토 등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형성되고 구체화된 물질계, (형성되어) 윤회하는 33천의 신계, 형성된 존재가 있는 그 어떤 세계도 아니다. 너무나 비구체적이기에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뭔가가 있다 - 형성되기 이전의 불사(不死)의 세계다. 태어남이 없으므로 죽음도 없고 - 12연기로 비추어보면 - 그렇기에 괴로움이 없는 세계다.


이 모든 세계, 이 모든 구체성을 초월한, 언어도단의 근원, 장자가 상대성의 초월을 주장하며 도(道)라고 표현하는 그 무엇인가에 ‘나는 누구인가’ 의 답이 있다.


장자의 존재적 구체성은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듯하다.

그래서 꿈과 현실의 경계 또한 희미해지고 허물어져간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누구라고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스스로를 돌아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비인가 장자인가?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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