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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Oct 28. 2024

[장자41] 대종사(14) 하늘의 벌을 받은 공자

"도를 따르는 이상한 사람이 되자"

[장자41] 대종사(14) 하늘의 벌을 받은 공자 / 이상한 사람이 되자


32. 자공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세계에 의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늘의 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세속에 머물 것이다.”

  자공이 물었습니다. “그 세계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 사람은 도(道)에서 살지. 물에서 사는 것들은 연못을 파주면 거기서 영양분을 받아 살아갈 수 있고, 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지 않고 가만두면 삶이 안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르기를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 잊는다.’ 했다.”

  “그 이상스런 사람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상스러운 사람’이란 보통 사람과 비교해서 이상할 뿐, 하늘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소인이 사람에게는 군자요, 사람의 군자가 하늘에는 소인이라’ 한 것이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장자가 공자의 입을 빌어 말하는 하늘이란 무엇인가? 고개를 들면 눈에 들어오는 저 푸른 창공인가, 흰구름 먹구를 떠다니고 밤이면 달과 별이 빛나는 천체인가? 물론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 독자님들도 알 것이다. 하늘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 무의식 깊은 곳의, 의식적으로는 잘 알기 힘든 어떤 곳을 뜻한다. 또한 이 세계에 편재한, 하나이며 모든 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 그것이 개별화된 의식체를 영혼이라고 부른다. 영혼이라는 명칭은 너무나 막연한 대상을 지칭한다. 사실 마음에 대해서도 막연하기는 마찬가지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영혼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떤 때는 마음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식(識)이라고도 불린다. 아래의 초기경(쌍윳따니까야) 내용 중 일부를 보자. 몹시 흥미로운 내용이라 경의 일부 내용을 인용했다.



(상략)

8. 그때 마침 존자 고디까가 칼로 자결했다.

9. 한편 세존께서는 그가 악마 빠삐만인 것을 알아채고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10. [세존]

“지혜로운 이들은 이처럼 삶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한다. 

갈애를 뿌리째 뽑아서 이 고디까는 열반에 들었다.”


11. 그리고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지금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보자. 거기서 양가의 자제 고디까가 칼로 자결했다."

12.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행승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13. 그래서 세존께서는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존자 고디까가 평상 위에 존재의 다발에서 해탈하여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14. 그런데 그때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15. 그때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너희들은 저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느냐?"

[수행승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16. [세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


- 쌍윳따니까야 4:23(3-3) 고디까의 경 중에서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열반 해탈을 목적으로 수행하던 붓다의 제자 고디까는 해탈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지만 여러번 실패를 겪었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 배수의 진을 치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가면서까지 결국 해탈을 이루었다. 악마 빠삐만은 고디까가 윤회할 의식(識)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지만 그는 해탈하였으므로 악마는 그를 찾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다는 내용이다.


‘티벳 사자의 서’ 에 의하면 인간이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죽은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의식과 청각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죽은 후 가야할 곳과 해탈할 수 있는 방법,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바른 길을 찾아가고 해탈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윤회를 기다리는 망자의 의식은 무서운 환상 등에 쫓겨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에는 인연이 닿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숨어들어간 후 잉태되어 다음 생을 맞이하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존재는 색수상행식(물질/육체, 느낌, 인식, 형성, 의식)의 다섯 요소들(각각을 무더기로 보아서 오취온이라고도 함) 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 중에서 색수상행의 네 요소는 죽음으로 인해 흩어져 소멸되며 다음 생으로 윤회하는 대상을 의식(識)이라고 한다. 보통 이런 의식을 대중적인 인식 하에서는 영혼이라고 부르며 영혼은 불멸하다는 관념으로 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의식에 대해서는 찰라마다 생멸하는 의식이라든지 하는 더 깊은 가르침과 논의들이 있으나 여기에서 논할 자리는 아니므로 생략한다.


하늘은 만물의 근원을 뜻한다. 

모든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근원이라 한다. 사실 지금 이렇게 읽고 쓰고 말하는 언어도 이 근원으로부터 나왔는데 ‘근원’ 이니 하는 언어로 지칭한다는 자체가 깊이 따지자면 결국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임시방편으로라도 설명해야 하니 이렇게라도 쓰는 것이다. 만물이 비롯된 근원에 대해 임시로 붙인 용어이다 보니 다른 표현으로 한 것들이 꽤 존재한다. 앞에서 언젠가 언급했던 노자 도덕경의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할 때의 도(道), 여기 장자에서도 수없이 반복되며 표현되는 그 도(道), 종교에서 인격화된 존재로 표현되는 신(神), 하늘은 하늘인데 인격화되어 높여 부르는 하느님, 그리고 다신론을 배척하며 유일한 신이라 숭배 받기를 원하는 하나님... 모두 다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이다. 대승불교의 일파인 선교에서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 라고 할 때의 불성도 같은 의미로 보면 된다.


그런데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인 천도교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이라 하여 사람이 곧 하늘이라 주장한 바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는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동시에 종교적 수행적 차원에서는 결국 모든 인간의 내면은 근원인 하늘과 맞닿아있다는 의미를 천명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장자의 본문을 살펴보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 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지 않고 가만두면 삶이 안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르기를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 잊는다.’ 했다.


자공이 물은 ‘그 세계’ 란 ‘하늘’ 이고 ‘도’의 세계이다. 도에서 사는 사람들이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는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이 부는 피리가 되어 하늘의 뜻대로 무엇인가를 하기는 하되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피리가 소리를 내는데, 아니 피리에서 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피리가 주체가 되어 내는 소리인가 아니면 바람이 통하면서 나는 소리인가? 그 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자공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세계에 의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늘의 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세속에 머물 것이다.”


하늘의 벌을 받는 사람은 일을 인위적으로, ‘내가 있다’, ‘내가 한다’ 며 인위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인위의 도와 덕을 세워서 인의예지신을 가르치고 그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도에서 사는 사람은 무언가 일을 하기는 하는데 자신이 한다는, 인위적으로 하는 개별적 의식이 없다. 에고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무위 혹은 무위행(無爲行)이라 하고, 하기는 하되 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늘과 도의 흐름에 따라 살며 일하는 무위라고 해서 제정신이 없이 사는 것은 아닐 터이다. 오직 자기자신이 모든 일을 하는 주체라는 고집을 내려놓고 탐진치에 물든 개별 의식을 할 수 있는 만큼 내려놓으면 된다. 그렇게 마음에서 비워진 탐진치의 공간만큼 도의 기운이 스며들어 작용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얼마만큼 됐는지 아닌지 재단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매사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진인사盡人事) 결과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않고 내맡기면(대천명待天命) 된다. 


이렇게 큰 흐름인 도를 따르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이라고 (공자의 입을 빌어서) 장자는 칭하고 있다. 이상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기에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위적인 행위와 개개의 작은 자아에 집착하여 아등바등 일을 하기에 이와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된다. 이렇게 하늘이 부는 피리가 되어, 하는 것인지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곧 ‘하늘의 소인’ 이고 ‘군자’ 이다.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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