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42] 대종사(15) 맹손재(孟孫才) / 나는 누구인가?
맹손재(孟孫才)
33.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맹손재는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곡은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근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상(喪)을 치르면서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었는데도 상을 잘 치렀다는 소문이 노나라에 다 퍼졌습니다. 실제로 그렇지도 않은데 이렇게 이름이 날 수 있습니까? 정말 이상합니다.”
34. 공자가 말했습니다. “맹손씨는 할 일을 다했다. 보통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더 앞선 사람이다. 사람들은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최대한 간소화한 셈이다. 맹손씨는 사는 까닭이 무엇인지, 죽는 까닭이 무엇인지, 또 앞서가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 뒤따라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 모두 잊어버린 사람이다. 그 사람은 변화 과정에서 한 사물처럼 되어, 알지 못하는 다른 변화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또 그가 변화하려 한다면 그가 아직 변화하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가 이미 변화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와 너는 지금 꿈을 꾸고 있고, 이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35. 더욱이 맹손씨의 몸에는 변화가 있지만 마음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집은 바꾸지만, 죽지 않는다. 맹손씨는 혼자 깨친 사람. 사람들이 곡을 하니까 자기도 곡을 하는 건 그에게 예사스러운 일이다. 또 사람들이 서로 ‘나는 나일뿐’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나’가 정말 ‘나’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너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에 오르기도 하고,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지. 지금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깨어난 상태인지 꿈꾸는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낫고, 웃음을 즐기는 것보다는 사물과 어울리는 것이 더 나으니,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 빈 하늘로 들어가도록 하라.”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필자가 서른 즈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오랜 지병을 앓다가 가셨기에 그다지 슬퍼할 일은 아니었다. 즐겁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고된 삶에서 벗어났으니 오히려 기뻐할만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은 으레 죽음은 좋지 않고 슬프며 거부해야 할 일인 듯이 여기지만 꼭 그렇게 여길 일이 아니라고 본다. 살면서 기쁘고 행복한 일이 고되고 힘든 일보다 훨씬 더 많은가? 당신의 삶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기에 아예 제로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로 상태란 더 이상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상태,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관 뚜껑을 닫기 전에 마지막 고인을 뵙는 시간이 있다. 이 때 이모가 나를 위로했다. 나는 덤덤하게 “저 육신이 어머니의 본체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삼일장 내내 나는 편안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종교가 카톨릭이었기에 마지막 장례미사를 치렀다. 장례미사를 담당한 신부님이 어떤 향 (멸치국물 우리는 스텐함처럼 생겼는데 훨씬 크기가 큰)을 들고 입장하시는데 평생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향내가 뇌를 자극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소리내어 꺼이꺼이 울었다. 그렇게 크게 울어본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후각은 뇌와 직접 연결되어 작용한다고 한다. 그러니 특히 손가락이 긴 분들은 콧구멍을 팔 때 제발 조심하시라! 잘못 하면 뇌까지 파고 들 수가 있다! (허허) 아무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어머니 가시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불효자가 될 뻔한 것을 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 가 정말 ‘나’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앞의 ‘나’ 는 우리가 흔히 별 생각 없이 쓰는 ‘나’ 이다. 분명 심신의 차원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나’ 와 ‘너’는 별도로 존재한다. 존재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분명 이 존재와 저 존재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다만 뒤의 ‘나’는 다소 깊이 사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어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얼토당토 않을 듯한 이 질문을 붙들고 수많은 세월을 헤매고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 소위 ‘구도자’ 라 불리는 이들이다. 독자들도 이미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나도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낼만한 열다섯 나이 때부터였다. 그 나이에 두 살 어린 동생이 죽었다거나 나는 그때 막 사춘기에 들어섰다거나 하는 가정사는 이제 더 이상 줄줄이 늘어놓기를 그만하고 -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표면일 뿐일 것이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나는(또 나라고 해야할 수 밖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 아니 찾아냈다기 보다는 결국에는 답이 찾아왔거나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답은 강렬한 빛이었고 환희였고 나없음 이었다. 몇 마디 언어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튼 결국에는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며 십 년 넘게 품어왔던 질문 자체가 사라졌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무엇이냐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질문 자체가 사라지고야 말았는데!
‘나’ 라는 생각이 있으니 ‘나’ 라는 존재에 대한 이런 저런 꼬리표들도 따라붙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해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라는 일상적인 생각으로만 자신을 여기는 상태와 그 차이를 아는 상태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숙제와 과정이 완전히 끝나서 생과 사의 끝없는 반복이라는 이 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 누군가에게는 물론 얼마 남지 않은 가까운 길일 수도 있겠지만.
장자는 현재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고 한다. 또한 ‘변화를 잊은 채 텅 빈 하늘로 들어가라’ 고 한다.
삶에 대한 아주 좋은, 적절한 태도가 모든 일에서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좋은 일 궂은 일 구별하지 않고 ‘새옹지마’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변화는 당연한 것이니 좋다 싫다로 나누지 말고, 그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잊은 채 ‘텅 빈 하늘’ - 물리적 창공이 아니라 도(道)와 하나인 근원 - 로 들어가는 것이다.
문득 두 시인의 마음이 떠오른다.
왜 사냐건 웃지요.
왜 사냐니?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 아닌가.
일부러 애쓰며 사는가? 그러니 힘들지.
그저 살아지는 것이다.
그런 삶에 대해 ‘왜’ 라고 물으니 시인은 그저 웃을 수 밖에.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쓴 천상병 시인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귀천이라는 시 또한 그의 유작같지만 이 시를 쓰고서도 23년이 지나서야 하늘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마음이 뭉클하다.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니.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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