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일 따름이겠지
[장자45] 대종사(18) 운명일 따름이겠지 / 삶의 목적을 찾는 길
운명(運命)일 따름이겠지
39. 자여(子輿, 가마 선생)와 자상(子桑, 뽕나무 선생)은 벗이었습니다. 장마 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리던 어느 날 자여가 생각했습니다. ‘자상이 분명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여는 먹을 것을 싸가지고 그에게 갔습니다. 자상의 집 문 앞에 이르자,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는 듯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님이실까 어머님이실까. 하늘이실까 사람들일까.”
힘에 겨워 목소리가 겨우 나오고, 가사도 곡에 맞지 않게 나왔습니다.
자여가 들어가 물었습니다. “자네 노래가 어찌 그런가?”
자상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를 이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온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아직 알 수가 없네. 부모님이 어찌 내가 이렇게 가난하길 바라셨겠는가? 하늘은 사심 없이 모두를 다 같이 덮어 주고, 땅은 사심 없이 모두를 다 같이 떠받아 주고 있으니 어찌 하늘과 땅이 사사롭게 나만을 가난하게 하였겠는가? 도대체 누구일까 알아보는데 알 길이 없네. 그런데도 내가 이처럼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니, 운명일 따름이겠지.”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오래전부터 비단은 옷감 중에서 가장 고급 제품으로 여겨져 왔다. 석유를 원료로 한 온갖 인공 섬유, 기능성 섬유들이 판치는 요즘에도 자연적인 고급감을 갖춘 비단만한 옷감을 따라가기는 힘들다.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누에가 비단의 원료가 되는 실을 뽑는다. 그런 누에의 먹이가 되는 것이 뽕나무의 잎이다.
이 대목에서 뽕나무 선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상(子桑)은 뽕나무에서 누에를 치는 사람인 듯하다. 장마 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리니 안그래도 가난한 살림에 누에 실을 뽑을 수 없어 더욱 어려워진 모양이다.
지금이야 온갖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뜻한다면 아이디어만 있어도 기존에 없던 직업도 만들 수가 있다. 능력과 수완만 있다면 당장 돈이 없더라도 크라우드 펀딩 등을 통해서 비교적 쉽게 자금을 모을 수도 있다. 또 당장의 형편이 너무나 어렵다면 사회 복지 제도의 도움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특히 2,000년도 더 과거인 장자의 시대는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거주지의 이동도 직업의 변동도 어려웠고 사회 제도도 미미했다. 또한 과거는 기상 조건의 영향도 훨씬 더 크게 받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불과 열흘간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도 자상은 자신의 처지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고 표현할 정도로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한다.
이 대목은 ‘큰 스승’ 을 뜻하는 대종사 편의 마지막에 해당된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필자는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장자는 어째서 대종사에 대한 이야기를 잘 전개해 나가다가 이런 이야기로 끝마쳤을까? 흔한 속닥처럼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 도(道)의 흐름에 맡겨서 운명임을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장자의 이야기 책을 손으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후대의 누군가가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며 끼워넣은 이야기일까?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일단은 장자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지혜로 추려서 활용할 수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장자의 시대에 지극히 현실적인 여건에 종속된 자상의 처지를 보았으니 이제 우리는 혼자 사는 세상, 나 혼자 잘 사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서는 곤란함을 알아야 한다.
잠시 기억을 되살려 과거의 경험들을 탐색해보자. 크든 작든 간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이 있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노인의 짐을 들어주었다던가 어린 시절 구걸하는 걸인에게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었던 일도 좋다. 싸이코패스 등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그런 기억에는 뿌듯함 등의 좋은 감정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착한 일을 하라 는 어릴 때부터의 교육 때문에 생긴 감정이 아니다. 필자는 그 이유가 ‘양심’ 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박한 현실에 적응하며 자랐고 그렇게 살아왔다. 타인을 향한 양보와 도움을 통한 뿌듯함을 알지만 가슴을 닫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아예 습관이 되었고 외부로부터 (마음이) 가난한 자신을 방어하는 기제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장자에 대한 글을 전개하면서 필자는 특히 장자의 도덕이 흔히 사회규범이나 윤리 요소로 여기는 도덕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언급했다. 다시 요약하자면 장자가 말하는 도덕은 우주의 바탕 원리와 실질적인 작용으로 편재해 있는 근원으로서의 도(道)이며 그런 도가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덕(德)이라 한다. 결국 도와 덕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의 다른 측면이다. 그리고 도덕은 우리의 내면에도 깃들어 있고 그것의 다른 이름을 또한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나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도(道)라고 부르든 덕(德)이라고 부르든 양심이라고 부르든 언어를 초월한 그것과 만나게 된다. 이를 가속화하는 과정이 명상이다. 그래서 명상은 가식, 관념, (나는 무엇이라는) 자만과 에고, 탐진치를 벗겨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의 명칭이 명상이라고 하더라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고 덧붙이고 욕심이 커지고 나는 무엇 이라는 관념을 키워가게 되는 것은 명상의 본질과는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명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슴을 닫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다면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에는 드넓은 바다에 고립된 작은 섬처럼 말라서 죽게 되고야 말 것이다.
본래 모두가 하나인 전체성(도道)과 합일하는 길은 우리에게 힘과 에너지를 준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함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떠올려보고 비록 당장은 작아 보이더라도 그 하나를 실천하는 데서 큰 발 걸음이 시작될 수 있다. 그 실천은 무엇보다도 큰 기쁨을 준다. 닫혀있던 가슴을 열리게 할 것이다.
이런 작은 한 걸음이 ‘가슴 뛰는 삶’ 의 비결이 된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주어졌으니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 나 자신만을(내 가족만을) 위한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더욱 확장된 삶의 목적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한 편의 글과 구절들로 인해서 여러분의 가슴에 작은 불씨 하나 전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운명일 수도......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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