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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Nov 12. 2024

[장자44] 대종사(17) 앉아서 잊다(좌망 坐忘)

채움 아닌 비움의 명상


[장자44] 대종사(17) 앉아서 잊다(坐忘) / 채움 아닌 비움의 명상


앉아서 잊다(坐忘)


38. 안회(顔回)가 말했습니다. “저는 뭔가 된 것 같습니다.”

공자가 물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좋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얼마 후 안회가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습니다. “저는 뭔가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예(禮)니 악(樂)이니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좋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얼마 지나 안회가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습니다. “저는 뭔가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좌망(坐忘)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좌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大通)과 하나 됨.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가 없지. 변화를 받아 막히는 데가 없게 된다. 너야말로 과연 어진 사람이다.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


이 결정적인 대목은 깊은 명상에 들었을 때의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세간에서 명상이라 칭하는 두 가지 방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비우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가 채우는 명상의 길이다. 보통 심상화라 하여 무언가를 상상하는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이 후자에 속하는 명상이다. 이 둘의 최종 목적지가 같을까? 글쎄,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이 장자의 텍스트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비우는 명상’ 에 대한 언급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리고 특히 좌망을 언급하는 이 대목이 그렇다. 명상을 하면서 비워지다 보면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이 사라진다. 또한 귀가 열려있으되 들리지 않고 눈을 뜨고 있으되 보이지 않게 된다. 뻔히 뜬 눈이지만 눈 앞의 사물들이 사라지고 단일색의 스크린을 펼쳐놓은 듯이 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 중에 6처 18계라는 것이 있다. 우리 몸의 여섯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신체감각으로 느끼고 의식하고) 가 외부의 감각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 각종 현상들) 을 만나 각각의 의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이루게 되는데 이 여섯 기관, 대상, 의식을 모두 합쳐서 18계라고 부른다.


사고나 질병 등으로 의식을 잃은 어떤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의 눈을 까뒤집고 동공을 살펴보더라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다. 강제로 눈은 뜨게 만들었지만 (눈꺼풀을 열어서) 대상을 보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전체 의식이 꺼지면서 안식 또한 꺼져버린 상태이기에 그렇다. 앞에서 어떤 명상의 상태에서는 뜬 눈으로도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깊은 명상에 든 사람의 경우는 의식을 잃은 경우와는 다르다. 명상가에게는 신식(身識, 신체의식)도 안식(眼識)도 꺼져있지만 근본이 되는 의식(意識)은 꺼지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있기 때문에 그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함으로써 잡다한 세상사로부터 들이치는 정보의 홍수를 피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게 하는, 감각적으로 느끼는 세상 모든 경험이 외부로부터의 정보의 유입이다.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할 뿐, 사실 이것을 정보의 양으로 따지면 엄청난 양이 된다. 그리고 이 ‘정보의 홍수’는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도道의 흐름’과 하나되는 것에 장애가 된다. 위 장자의 구절에서 ‘큰 트임(大通)’ 이라 한 대목은 결국 도(道), 하늘, 근원 등과 하나됨의 다른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라고 하면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눈을 감으면 외부 세계의 대상들로부터의 시각적 인식이 차단됨으로써 주의를 안으로 돌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주의를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향함으로써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내부의 잡념과 망상에 익사할 정도가 되지는 않던가? 그게 아니라면 잠의 함정에 빠져들기도 아주 쉽다.


흔히 기도는 교회의 대표적인 전유물이고 명상하면 절을 떠올린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일정 부분은 그렇다고 치자. 절에 가서 명상의 대표 주자인 불상들의 눈을 보면 어떤 모습인가? 하나같이 예외 없이 눈을 뜨고 있다. 어느 불상에서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앉아서 중생들이 뭘 하나 살피는 것이 아니다. 이 분들은 명상에 들어 계신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손의 모습을 보고 아는 것이다. 붓다의 손 모양 하나하나가 일정한 모양을 띄고 있는데 이를 수인(手印)이라 하며 특정한 명상의 의식 상태를 나타낸다.


정리하자면 명상에서 반드시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은 오해다. 그렇다고 눈을 완전히 뜬다면 주변 잡다한 사물들에 마음을 빼앗겨 산만하게 된다. 그래서 사찰의 불상처럼 눈을 반쯤만 뜨고 아래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것이 정석이다.


명상이라는 용어는 한자로 명상(冥想 - 어두울 명, 생각 상) 혹은 명상(瞑想 - 눈 감을 명, 생각 상) 이라고 쓰는데 후자의 눈 감는 생각? 혹은 생각에 눈 감다?는 해석은 뭔가 어색하다. 전자의 뜻으로의 명상(冥想)으로 생각을 어둡게(사라지게) 한다는 풀이가 의미에 훨씬 잘 들어맞는다.


안회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수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대목의 대화에서 안회는 실제 도(道)와 하나되는 체험과 수행에서 스승인 공자를 뛰어넘는다. 공자는 가야 할 길을 다 알고 있지만 그 너머 - 좌망(坐忘) - 에 도달하지는 못한 듯하다.


안회는 인의(仁義)의 경지를 넘고 예악(禮樂)의 경지를 넘었다.

여기서 인의예 까지는 익숙한데 악(樂)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 가자.



악(樂)

요약) 고대 중국, 특히 주(周)나라 때 ‘예(禮)’와 더불어 정치상 중요시하였던 개념.

‘예’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지닌 것인 데 비하여, ‘악’은 인심을 감화(感化)하는 효용을 지닌 것이라고 하였다. 주공(周公)은 특히 ‘예악’을 강조하여 예악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는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다고 전한다. ‘악’은 또한 이 시대의 대학 교과였던 6예(六藝)의 하나에 끼었는데, 그 중에서도 ‘예’와 더불어 가장 중요시되었다. ‘악’의 바탕을 이루었던 《악경(樂經)》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예기(禮記)》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악기(樂記)>에서 어느 정도의 윤곽을 찾아볼 수 있다. ‘악’의 제도는 매우 복잡하지만 《의례(儀禮)》 《주례(周禮)》로써 거의 알 수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저는 좌망(坐忘)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좌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大通)과 하나 됨.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가 없지. 변화를 받아 막히는 데가 없게 된다. 너야말로 과연 어진 사람이다.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


여기서 좌망이란 불교의 선교에서 말하는 좌탈입망과는 다른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일상심에서 자신의 몸을 자신의 근본이라 여기는 실수를 한다. 하지만 좀 더 자신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몸이 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떨까? 마음이 참된 나인가? 몸이 참 자기가 아님을 알고 나면 그 다음은 마음 또한 그렇지 않음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우주와의 합일이니 온우주가 나라는 둥 참나가 무엇이라는 둥 무아(無我)라는 둥 여러가지 말들이 나온다. 이쯤 되면 뭐가 맞고 뭐가 그르고를 논하며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실참 수행을 통해 알아가면 될 뿐.


본문에서 ‘몸을 잊어버리고...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이라는 표현 또한 흥미롭다.

여기서의 앎이란 지식을 뜻한다. 지식은 ‘큰 트임’ 인 도(道)와 하나 됨에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이다. 논리를 초월한 우주에 지식과 앎으로 맞서려 하면 결과는 ‘하나’ 아닌 ‘분리’의 괴로움이 덮칠 뿐이다. 오늘도 한 마디 마음에 새기며 간다.


(알량한 앎을 몰아내며)

오직 모를 뿐.

그저 할 뿐.

오늘도 한 걸음.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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