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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Nov 18. 2024

[장자46]응제왕(1) 치세治世를 위한 단 하나의 원리

황제와 임금의 자격

[장자46] 응제왕(1) 황제와 임금의 자격 / 치세(治世)를 위한 단 하나의 원리


황제와 임금의 자격1 - 순(舜) 임금과 태씨(泰氏)
   
  1. 설결(齧缺, 이 빠진 이)이 왕예(王兒, 왕의 후예)에게 물었습니다. 네 번 물었는데, 네 번 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설결은 껑충 뛸 정도로 크게 기뻐하며 스승 포의자(蒲衣子, 부들풀옷 선생)에게 가서 이 말을 전했습니다.

  포의자가 말했습니다. “너는 그것을 이제야 알아냈느냐? 순(舜) 임금은 태씨(泰氏)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순 임금은 아직도 인(仁)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려 하는데, 그렇게 해서도 사람을 끌어 모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직 시비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태씨는 누워 잘 때는 느긋하고, 깨어 있을 때는 덤덤하여, 때로는 스스로 말(馬)이 되고 때로는 스스로 소가 되기도 한다. 그 앎은 실로 믿음직하며, 그 덕은 아주 참되다. 그는 시비(是非)의 경지에 빠져 있지 않다.”


2. 견오(肩吾)가 미친 사람 접여(狂接輿)를 만났는데, 접여가 물었습니다. “일전에 중시(中始)가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던가?” 견오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이가 스스로 원칙과 표준과 의식과 규례를 만들어 내면 사람들이 듣고 교화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접여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엉터리 덕이다. 세상을 그렇게 다스리는 것은 마치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고, 강에다 구멍을 파고, 모기 등에다 산을 지우는 것이다. 성인이 다스리는 것이 어디 밖을 다스리는 일인가?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나서 행동하고 일이 제대로 되는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새는 하늘 높이 날아야 화살을 피하고, 들쥐는 사당 언덕 밑을 깊이 파고들어야 구멍에 피운 연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나와 잡히거나 파헤쳐져 잡힐 걱정에서 벗어난다. 자네는 오히려 이 두 미물(微物)보다 못하군.”


3. 천근(天根)이 은양(殷陽) 남쪽에서 노닐다가 요수(蓼水)에 이르러 우연히 무명인(無名人)을 만나 물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무명인이 말했습니다. “물러가시오. 비열한 사람. 어찌 그렇게 불쾌한 질문을 하시오. 나는 지금 조물자와 벗하려 하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저 까마득히 높이 나는 새를 타고 육극(六極) 밖으로 나가 ‘아무것도 없는 곳(無何有之鄉)’에서 노닐고, ‘넓고 먼들(壙埌之野)’에 살려고 하오. 당신은 어찌 새삼 세상 다스리는 일 따위로 내 마음을 흔들려 하오?”

  천근이 또 묻자 무명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을 담담(淡淡)한 경지에서 노닐게 하고, 기(氣)를 막막(漠漠)함에 합하게 하시오. 모든 일의 자연스러움에 따를 뿐, ‘나’라는 것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하오. 그러면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오.”



4. 양자거(陽子居)가 노자(老子)에게 말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메아리처럼 민첩하고, 기둥처럼 튼튼하고, 사물을 뚫어 보고, 머리가 명석합니다. 그러면서도 도를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히 ‘명철한 왕(明王)’에 비견할 만합니까?”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성인과 비긴다면 이런 사람은 고된 종이요, 일에 얽매인 재주꾼에 불과하오. 몸을 지치게 하고, 마음을 졸일 뿐이지. 호랑이나 표범의 무늬는 사냥꾼을 끌어들이고, 재주 부리는 원숭이나 너구리 잡는 개는 목줄에 매이게 되는 것. 이런 사람을 어찌 명철한 왕에 비길 수 있다는 건가?”

  양자거가 놀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은 어떠하온지 여쭙고 싶습니다.”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한 것으로 알고 기뻐하기 때문이라. 이런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서 있고, 없음(無)의 세계에 노니는 것이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드디어 대종사 편이 끝나고 장자 내편의 마지막 편인 응제왕 편이 시작되었다. 이 파트의 내용은 왕과 황제가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주제로 하고 있다. 결국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지도자는 도의 흐름을 따르고 무위 자연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시비의 경지, 원칙과 규례, ‘나’ 라는 자의식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대목에 올리는 텍스트 내용이 다소 길기에 각각의 구절에서 핵심이 되는 대목만을 뽑아서 간략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1.

순 임금은 아직도 인(仁)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려 하는데, 그렇게 해서도 사람을 끌어 모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직 시비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장자의 초반에서 장자는 상대성을 초월해서 절대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길고 짧고, 밝고 어둡고, 빠르고 느리고, 높고 낮은, 이런 온갖 상대성마저 초월해서 그 모든 상대성을 녹이는 단 ‘하나’, 절대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 하는 시비의 경지에 머무르는 지도자라면 그 자격이 오죽하겠는가! 또한 공자와 같은 방식으로 인위의 길을 따라 인(의예지신 모든 규례가 마찬가지다)을 바탕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정도로는 어림 없음을 성토하고 있다.


2.

“사람을 다스리는 이가 스스로 원칙과 표준과 의식과 규례를 만들어 내면 사람들이 듣고 교화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친 사람) 접여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엉터리 덕이다. ......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나서 행동하고 일이 제대로 되는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이 대목에서도 사람의 다스림에 있어서 원칙, 표준, 의식, 규례 따위의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음을 강조한다.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런 후에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가를 확인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을 올바르게 함이란 무엇일까?

이 역시 앞에서부터 수없이 강조되어 온 장자의 뜻에 의하면 도(道)와 하나됨을 뜻한다. 도와 하나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이 또한 필자가 앞에서부터 수없이 강조한 바와 같다. 자신의 본연의 마음에 뒤섞여 하나가 되어버린 탐진치 - 욕심, 화, 어리석음 - 를 비우고 버려야 한다. 도(道)는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연결된 근원의 흐름인데 이와의 연결성을 막고 있는 것이 그 중간에 자리잡은 탐진치이기 때문이다. 막힌 파이프라인으로는 물이 제대로 흐를 수 없다.


무선 와이파이 공유기와 수신기의 경우를 잠깐 떠올려보자.

와이파이 공유기는 인터넷으로부터 특정 정보를 내려받아 그 신호를 무선으로 보낸다. 이 신호를 PC나 스마트폰 등에서 받아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로 변환해서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와이파이 공유기와 수신기 사이에 콘크리트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신호는 사용자 측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공유기 등 정보를 발신하는 측은 근원, 도(道), 하나, 하늘, 하느님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보를 수신하고자 하는 측은 우리 인간들 각각의 개별 의식이다. 그렇다면 중간을 가로막은 콘크리트 벽은? 이것이 바로 탐진치이다. 탐진치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고 얼마든지 스스로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다. 올바른 방법만 적용한다면 말이다.


잠시 과거사에 기반한 (어쩌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이 콘크리트벽을 특정 종교에서는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원죄라고 표현해왔다. 혹은 신의 뜻은 오직 성직자들만이 알 수 있으므로 - 즉 콘크리트 벽 너머의 신호는 특정인만이 받을 수 있기에 - 그들을 통해서만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세뇌해왔다. 당연히 이런 관념들은 진실이 아니다.


한 때 유행했던 광고의 한 마디를 패러디해본다.


‘도(道)와의 합일은 과학입니다’


과학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콘크리트 벽이 신호를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을 없애기만 하면 된다(열 수 있는 문이 없다는 가정 하에). 

방법은 드릴과 햄머가 필요할 것이다.



3.

“당신은 마음을 담담(淡淡)한 경지에서 노닐게 하고, 기(氣)를 막막(漠漠)함에 합하게 하시오. 모든 일의 자연스러움에 따를 뿐, ‘나’라는 것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하오. 그러면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오.”


장자는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계속 같은 식의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다. 

마음을 담담하게, 기를 막막하게 하라고 한다. 담담(淡淡)의 담(淡)은 ‘맑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결국 마음을 담담하게 하라는 것은 마음을 맑게 하라는 뜻이다. 장자의 설명은 여기까지지만 이 또한 붓다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마음을 오염시키는 가장 큰 세 가지 독이 탐진치(貪瞋痴)이므로 이를 중심으로 해독하면 마음은 맑아지게 된다.  기(氣)를 막막(漠漠)하게 하라는 말에서 막(漠)은 넓다는 뜻이다.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글에서 필자는 기(氣)란 근원과 물질 세계 사이를 잇는 중간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결국 기(氣)를 막막(漠漠)하게 - 넓게 - 만들수록 근원(道)과의 소통하는 길이 넓어지게 된다. 즉 소통이 원활해지고 합일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넓은 의미로 보면 마음을 담담하게 함은 기를 막막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런 결과로 우리는 무위함으로써 (근원과 하나 되어) 참된 자연스러움을 갖출 수 있다. 또한 본문의 표현대로 ‘나’ 라는 것이 들어올 틈이 사라지게 되고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세상은 궁극적인 다스림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다.



4.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한 것으로 알고 기뻐하기 때문이라. 이런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서 있고, 없음(無)의 세계에 노니는 것이다.”


위의 1-3번 항목이 모두 갖추어진 지도자라면 거기에 ‘나’ 는 없다. ‘내가 했다’ 는 자만도 없다. 하지만 그 지도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지도자는 마음을 담담하게, 기를 막막하게 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시비의 경지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처럼 가장 윗 지도자가 도와 하나되는 치세의 법을 터득하였으니 아랫 사람들이 어찌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있으리!



P.S.

장자가 말하는 궁극의 치세든

공자가 말하는 인위의 치세든

혼란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저 답답한 마음으로 이어질 뿐.

바로 잡는데 손을 보태자니 마음이 어지럽고

고개를 돌리자니 목이 뻣뻣하구나.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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