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鄭)나라에 계함(季咸)이라는 신통한 무당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 살아남고 죽게 되는 것, 화나 복을 받는 것,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등을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연월일(年月日)까지 알아맞히는 것이 꼭 귀신같았습니다. 정나라 사람들은 그를 보면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열자(列子)만은 계함을 만나보고 심취하여 돌아와서 스승 호자(壺子)에게 아뢰었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선생님의 도(道)가 지극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보니 그보다 더한 도가 있습니다.”
호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도의 껍데기만 가르치고 아직 그 알맹이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내가 가르치는 도를 다 터득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암탉이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어떤 달걀이 나오겠느냐? 너는 그 [알맹이도 없는] 도를 가지고 세상과 겨루어 필경 세상이 너를 믿게 되리라 생각했더냐? 그러니 그따위 사람이 너의 관상이나 보게 된 것이지. 어디 한번 그 사람을 데리고 와 나를 보게 해보아라.”
6. 다음날 열자가 무당과 함께 호자를 만났습니다. 무당은 밖으로 나와서 열자에게 말했습니다. “아. 당신의 선생이 죽게 되었소. 살 수가 없지.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나는 그에게서 이상한 것을 보았소. 물에 젖은 재(恢)의 상이었소.”
열자가 들어와 눈물로 옷깃을 적시면서 그 말을 호자에게 전했습니다.
호자가 말했습니다. “아까 나는 무당에게 땅의 모양을 보여 주었다. 싹이 트지만 흔들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 모양이지. 그는 분명 나에게서 덕의 움직임이 막힌 것을 조금 보았을 것이다. 또 한번 데려와 보아라.”
7. 다음날 또 열자는 무당과 함께 호자를 만났습니다. 무당은 밖으로 나와서 열자에게 말했습니다. “다행히 당신의 선생이 나를 만나 병을 고쳤습니다. 이젠 살 수 있겠소. 그에게서 막혔던 것이 트인 것을 보았소.”
열자가 안으로 들어가 이 말을 호자에게 전했습니다.
호자가 말했습니다. “아까 나는 하늘과 땅의 모양을 보여 주었다. 이름이나 실질이 끼어들 틈이 없고, 기운의 움직임이 발꿈치에서 나오는 것. 무당은 분명 나에게서 움직임이 원활함을 조금 보았을 것이다. 또 한번 데려와 보아라.”
8. 다음날 또 무당과 함께 호자를 만났습니다. 무당은 밖으로 나와서 열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선생은 일정하지 않소. 나는 이제 도저히 그의 관상을 볼 수가 없소. 일정해지거든, 다시 한번 보기로 하겠소.”
열자가 안으로 들어가 이 말을 호자에게 전했습니다.
호자가 말했습니다. “아까 나는 무당에게 더할 수 없이 큰 빔(沖)을 보여 주었으니 분명 나에게서 균형 잡힌 기의 움직임을 보았을 것이다. 빙빙 돌아 모이는 물도 못(淵)이고, 괴어 있는 물도 못이고, 흐르는 물도 못이다. 못에는 아홉 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세 가지를 보여 준 셈이다. 어디 다시 데려와 보아라.”
9. 다음 날 또 무당과 함께 호자를 만났습니다. 무당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얼이 빠져 달아나 버렸습니다. 호자가 말했습니다. “따라가서 데리고 오라.”
열자가 따라갔으나 잡지 못하고 되돌아와 호자에게 아뢰었습니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간 곳을 몰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호자가 말했습니다. “아까 나는 그 사람에게 내가 근원에서 아직 나오기 이전의 본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 근원 속에서 나를 비워 사물의 변화에 그대로 따라,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고, 물결치는 대로 흘렀지. 그래서 그가 달아나 버린 것이다.”
10. 그 후 열자는 자기가 아직 배움을 시작조차 못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삼 년간 두문불출하고, 아내를 위해 밥도 짓고, 돼지도 사람 대접하듯 먹이고, 세상일에 좋고 싫고를 구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깎고 다듬는 일을 버리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로 돌아갔습니다. 흙덩어리처럼 홀로 그 형체만으로 서서, 여러 가지 엉킴이 있어도 그는 봉한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한결 같은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본문이 다소 길기는 하지만 참으로 재미있는 글이다. 또한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큰 내용이다.
계함이라는 신통한 무당은 인간만사 길흉화복을 너무나 정확하게 점치는 사람으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대개 길흉화복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벌게 될까, 직장에서 승진은 어떻게 될까, 연애운은 어떨까, 누구와 결혼해서 행복해질까......
세상 산다는 것이 나 혼자의 일이라 해도 결국 닥쳐올 노병사로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범위가 넓어질수록 확실한 행복의 가능성은 점점 더 옅어질 수 밖에 없다. 결혼을 하게 되면 배우자와 그 식구들까지 포함되어 변수가 많아져 복잡해지고 또 시간이 흐르면 자식의 일까지로 범위가 넓어진다.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잠깐, 훨씬 더 많은 나머지 시간들에 괴로움은 잠복해있다. 물론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일은 그 자체로 행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막상 현실이라는 뚜껑을 열어보면 금슬 좋은 배우자를 찾기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붓다께서 진리라고 표명하신 네 가지 진리의 첫번째가 괴로움이다. 진리는 그것을 우주 어디에 갖다 놓아도 여전히 팩트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다. 붓다는 ‘삶이 전부 괴로움’ 이라고 하지 않았다. ‘삶에는 괴로움이 있다’ 고 했다. 그리고 개개의 경우에 따라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크든(지옥에서의 괴로움을 떠올려보자), 혹은 작든 (천국에서 있을지 모르는 티끌만할 괴로움을 떠올려보자) 생과 사를 반복하는 데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괴로움이 없다고 여겨질지라도 삶은 그 자체로 괴로움의 원인이 잠재되어 있으며 미래에 닥쳐올 모든 괴로움까지 완전히 소멸할 방법과 그래서 괴로움이 아주 완전히 끝장난 상태가 있음을 천명했다.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진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이다.
얼마전 지난 여러 편들을 총망라한 에이리언 (로물루스) 영화를 보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시리즈의 기원이 되는 편부터 신나게 보아왔기에 과거 젊은 시절의 향수까지 더해져 더욱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과거와는 약간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만약 이 흉악하고도 생존력이 막강한 괴물같은 존재인 에이리언들에게는 괴로움이 있을까? 물론이다. 그들에게도 늙음과 죽음, 그외 다치거나 아픔 등의 괴로움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그 원인 또한 존재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멸할 방법 - 팔정도 - 과 완전히 소멸한 상태 - 열반과 해탈 - 또한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포악한 성정상 바른 명상 수행을 할 리야 없겠지만.
이런 상상 속의 존재들뿐만이 아니라 우주에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그 어떤 외계인에게도 고집멸도를 바탕으로 하는 사성제는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진리라고 한다. 우주의 그 어느 곳, 그 어떤 존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붓다의 8만4천 방대한 법문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성스럽다’는 표현을 써서 성스러운 진리 (성제聖諦)라 칭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주역(周易)의 원리를 공부하면서 그것을 바른 수행이라고 부른다. 주역은 기본적으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다. 현실 세계에서의 좋고 나쁨, 시시비비를 점치는 것은 그 근본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방도가 아니다. 결국 삶의 소용돌이는 죽음으로써 일시적으로는 끝을 맺는 듯하지만 결국 인과업에 의해 끝없이 리셋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역과 같은 것은 괴로움을 제거하는 방편이 될 수 없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도 모든 집착하는 대상에 대한 무상함을 깨닫고 참된 비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일 뿐.
본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족집게 같은 무당을 두려워하지만 열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너무도 족집게 같은 무당이 묻지도 않은 말을 너무나 정확히 술술 늘어놓는다면 어떻겠는가? 결국 당신이 죽는 날과 시간까지 말이다. 사람들이 족집게 무당을 찾아다니지만 점치는 실력이 이쯤 되면 사람들이 기피할 만도 하다. 하지만 열자는 최소한 그런 두려움을 없앨 정도의 내공은 있었던 모양이다.
열자의 스승인 호자는 도를 통한 사람이다. 호자가 무당에게 보여주는 모습들은 인간으로서의 정형화된 모습부터 궁극적 도의 현현까지 다양하다. 이중에서 해석의 필요가 있는 부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무당은 밖으로 나와서 열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선생은 일정하지 않소. 나는 이제 도저히 그의 관상을 볼 수가 없소.” 호자가 말했습니다.
“아까 나는 무당에게 더할 수 없이 큰 빔(沖)을 보여 주었으니 분명 나에게서 균형 잡힌 기의 움직임을 보았을 것이다. 빙빙 돌아 모이는 물도 못(淵)이고, 괴어 있는 물도 못이고, 흐르는 물도 못이다. 못에는 아홉 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세 가지를 보여 준 셈이다.”
여기서 호자는 무당에게 충(沖)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이는 역자의 표현대로 ‘빔/비어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뒷 구절의 표현처럼 ‘균형잡힌 기의 움직임’ 으로 볼 때 심오하고 부드러운 어떤 성질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충(沖)이라는 한자를 파자하여 보면 물(삼수변)이 가지는 가운데의 성질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구절이 있다. 직역하면 높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동양철학에서 자연을 대표하는 성질(기운)들을 모아 다섯 개체로 대표한 것이 오행五行이다. 즉 자라고 성장하며 팽창하는 성질을 대표하는 것이 나무인 목木이며, 이는 나무 그 자체라기 보다는 나무의 그러한 성질의 기운을 뜻하는 것이다. 뜨겁고 확산하며 일시적으로 확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성질을 대표하는 것이 화火인 불이다. 만물의 생장의 바탕이 되며 움직임이 없고 느긋한 것이 토土인 흙이다. 가장 단단하고 날카롭고 다른 것을 부수고 파괴하는 것이 금金이다. 만물에 스며 있으면서도 존재감이 없으나 생명의 근원이고 녹이고 섞으며 어우러지는 것이 수水인 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 볼 만한 것이 있다. 노자는 왜 물의 (성질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상도약수(上道若水)라 하지 않고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며 선(善)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는 아마도 장자의 위의 이 대목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가 이전글에서도 여러번 피력한 바와 같이 궁극의 도(道)와 물질화된 현실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중간 매체를 기(氣)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기(氣)는 여러 층차의 상태로 나누어볼 수 있는 것이기에 궁극의 도(道) 바로 아랫단의 아직 물질화되지 않은 특정한 성질의 에너지(氣)를 선(善)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왜 선이냐 하면 노자와 장자가 추구하는 도(道)에 그만큼 가까이 간 것이기 때문이다.
호자가 말했습니다.
“아까 나는 그 사람에게 내가 근원에서 아직 나오기 이전의 본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 근원 속에서 나를 비워 사물의 변화에 그대로 따라,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고, 물결치는 대로 흘렀지. 그래서 그가 달아나 버린 것이다.”
호자는 드디어 물과 같은 기(氣)의 차원 (상선약수上善若水)을 넘어서 궁극의, 근원과 하나된 경지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작은 나인 에고의 경계를 내려놓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고 물결치는 대로 흘렀다. 무당 계함은 오직 길흉화복을 점치는 하급한 경지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경지와 합일된 호자를 보고 경외감을 느끼며 달아나 버린 것이다.
10. 그 후 열자는 자기가 아직 배움을 시작조차 못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삼 년간 두문불출하고, 아내를 위해 밥도 짓고, 돼지도 사람 대접하듯 먹이고, 세상일에 좋고 싫고를 구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깎고 다듬는 일을 버리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로 돌아갔습니다. 흙덩어리처럼 홀로 그 형체만으로 서서, 여러 가지 엉킴이 있어도 그는 봉한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한결 같은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 대목의 마지막 문단 또한 무척이나 재미있는 구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참된 도를 추구한 열자의 변화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열자가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 대접하듯 먹인 것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서도 만물에 차별이 없었다는 뜻이다. 또한 자비심으로 충만한 마음이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아닐런지! 그리고 시비를 가리지 않으므로 좋고 싫고를 구별하지도 않았다.
깎고 다듬는 일을 버렸다고 한다. 이는 지식의 추구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장자는 의식적 지식의 추구에 대한 회의론자였다. 지식은 근원과 하나 되는 데 있어서 저항 요소로 작용할 뿐이다. 명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많이 안다고 해서 명상 수행이 깊이 들어가지지 않는다. 실천하는데 꼭 필요한 지식 정도 외에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 장자의 이런 비유적 표현의 결정체가 바로 통나무이다. 그야말로 존재의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뜻한다.
흙덩어리 또한 통나무와 동일 선상의 비유라고 볼 수 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간 사람을 직접 보게 되면 그는 달리 보이게 된다. 사람이 거기 있기는 하되 평상시와 같이 세세한 모습이 아닌 그림자만 남은 듯이, 시커먼 형체와 껍데기만 남은 듯이 보이는 것이다. 그에게는 알맹이가 없다. 그 상태에서는 평상시와는 달리 ‘나’ 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본질적인 모습을 보는 것도 보는 눈이 있어야 보일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