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한때 유행했던 코미디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다.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라면 이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등장하는 용어인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색(色)은 물질을 뜻하고 공(空)은 비어있음을 뜻한다. 직역하자면 물질은 텅 빈 허공에서 나오고 그 반대 개념 또한 성립한다. 참으로 오묘한 말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제각각의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 양자역학 등 과학적인 관점을 들이대고 나름의 이해를 더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재미있는 현상이고 일견 현상적 진리와도 잘 부합하는 듯하다.
하지만 초기불교, 붓다의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이 말의 참된 의미는 그리 복잡하지도 오묘하지도 않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한 구절만 가지고 보니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말한다.
색즉시공.
수즉시공(受卽是空).
상즉시공(想卽是空).
행즉시공(行卽是空).
식즉시공(識卽是空).
요약하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곧 공이라는 의미다.
색수상행식은 불교를 믿든 안믿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든 아니든 간에 붓다의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기본 공식과 같은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서 존재는 오온(五蘊) - 오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한다. 존재는 다섯 무더기들의 집합이라는 뜻이다. - 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로 나누자면 몸과 마음이며 마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눠보면 수상행식 -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고 몸은 물질인 색으로 구성된다.
대승불교에 가까워질수록 참나도 찾고, 불성이 참나라 하고, 번뇌가 깨달음이라는 등 여러가지 복잡한 선문답 같은 말들을 하는데 본래 붓다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경전이기는 하지만 붓다의 본래 가르침의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 바탕에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삼법인(三法印)이 빠질 수 없다. 색즉시공 등은 무아를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무상은 흔히 쓰는 표현처럼 허무의 감정을 뜻하지 않는다.
무상은 글자 그대로 ‘항상 그대로인 것은 없다’, 즉 모든 것이 계속 변한다는 뜻이다.
만물은 형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된다.
무상은 감정이 아니라 이런 현상적 진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괴롭다.
재물도 사랑하는 사람도 항상 그대로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무상의 진리를 따른다. 언젠가는 헤어지고 젊음의 청춘 또한 가버린다. 늙고 병들고 지치고 죽는다. 나만 그렇다면 억울하기만 할지도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들 또한 그러니 슬프고 괴롭다.
무상하므로 괴로움이다.
또한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오온 또한 무상하다. 색즉무상, 수즉무상, 상즉무상, 행즉무상, 식즉무상. 그러므로 오온 또한 무상하기에 진정 ‘나’ 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이를 ‘무아’ 라고 하는 것이다.
무상하므로 무아이다.
현상적 진리를 뜻하는 무상, 고, 무아 - 삼법인의 의미이다.
엄밀히 말하면 같은 글자인 공에 대해서도 붓다의 가르침과 후대 불교인 대승에서의 이해와 해석은 상당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 모든 차이를 이해하면 본질적인, 바른 수행에 도움이 될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오컴의 면도날 이론이 우리의 이해를 밝혀주었듯이 많은 경우에 진리의 나침반은 복잡함이 아닌 단순함을 향한다.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그리고 존재론적 구성체인 오온이 그러하듯이 붓다 본래의 가르침에 복잡성은 없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깨달음의 원리는 전혀 복잡하지 않다.
탐진치(貪瞋癡)를 완전히 뿌리 뽑으면 열반(涅槃)이고 해탈이다.
마음의 안과 밖, 온 우주를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 그것 또한 열반과 해탈이다.
두 진술은 전혀 다르지 않다.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우주를 가득 채우면 거기에 탐진치가 발 디딜 틈은 단 한 치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가는 길이 쉽지 않을 뿐.
그 길의 바탕 이해에 사성제가, 실천적인 방편에 팔정도가 있다.
어릴 적 찾아 헤맸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과 집착의 답을 10년 만에, 일찌감치 찾아냈던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때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 - 오온은 참으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 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모든 지난, 그리고 현재의 경험은 그대로의 의미가 있는 일일 테지만.
감히 먼저 걸어온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다.
굳이 참나를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수많은 성인들, 선지식(善知識)들께서 주신 가르침이 찬연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