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방영 중인 '그해 우리는'이라는 요즘 핫한 드라마가 있다.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주인공인 웅과 연수 두 사람 사이에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 주인공들의 감정에 포커스를 둔 이 드라마는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나 불륜 같은 막장이 있는 드라마도 아니다. 보고 있으면 절로 광대가 올라가는, 보다 보면 우리네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고 마냥 어리고 찬란했던 이십 대가 생각나고 그렇다. 싱그러웠던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였다.
<EP 1>
드르륵 선생님이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반장!"
"네. 차렷 경례!"
"선생님 안녕하세요!"
내가 초중고등학교 시절 10년 넘게 외치고 매일 들었던 소리다. 지금도 수업 전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저렇게 인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경례를 외쳤다. 친구들이 날 매년 반장으로 뽑은 이유는 아마 만만 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목소리가 너무 컸거나.
고등학교 2학년 내 생일이었던 어느 여름날, 담임 선생님의 부름으로 교무실에 갔다가 교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처럼 앞문으로 들어가 반 친구들에게 전달 사항을 말하려 하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일제히 날 보자마자 "와" 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내 생일을 모두 어떻게 알았지? 생각하며 날 축하해주려고 그러나 보다 하고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그런데 웬걸 그게 아니라 다른 학교 남학생이 내 생일을 축하한다고 업체를 통해 꽃바구니를 보낸 것이었다. 응? 같은 초등학교 동창 이준이 보낸 꽃바구니였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어깨가 봉긋해져서 돌아다녔다.
<EP 2>
"이거 읽어봐!"
한눈에 봐도 열 장은 족히 넘을만한 A4 종이 뭉치가 내 눈앞에 휘리릭 던져졌다. 아마 내 고등학교 인생 중 최대 난관이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 베프였던 우리가 내게 서운했던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A4 용지에 기록한 뭉치였다. 다 읽고 말문이 막혔다. 내가 이렇게까지 서운하게 했던가 잘못을 했던가 억울했다. 우리와 몇 주 동안 본체만체하며 얘기도 안 했고 나는 어떻게 하면 오해가 풀릴지 내내 생각했지만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래전 이야기라 우리가 어떻게 극적으로 화해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내가 약 올려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잠시 멈춰있었던 우리의 교환일기는 매일매일 계속되었다. 싸움조차 귀엽고 서툴렀던 십 대였다.
<EP 3>
"이게 다 김현주 너 때문이야! 책임져! 나 이제 어떡하냐고 책임지라고!"
"아니 이게 왜 다 나 때문인데! 너 그렇게밖에 말을 못 해? 왜 이게 나 때문이냐고!"
직장 다닐 때 베프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줬다. 친구는 상대방 남자를 무척 좋아했지만 상대방 남자는 친구랑 썸을 타다가 갑자기 잠수를 타버렸다. 친구는 속상한 나머지 소개팅 주선 당사자인 내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이게 다 소개팅을 주선한 너 때문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친구의 답답한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속이 상한 나머지 휴대폰을 붙잡고 따지듯이 물었다. 몇 분 후 친구는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우리 둘은 며칠 후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 신점을 보았다. 신내림 받은 그 무당은 그 남자는 바람둥이라 했고 너의 인연은 따로 있다 했다.
<EP 4>
고등학교 1학년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날, 아침부터 부지런 떨며 머리를 빗고 또 빗고 최신 유행템이었던 통바지와 달라붙는 티셔츠로 깔맞춤을 하고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저 멀리 친구가 걸어오는데 보자마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친구는 단발머리였는데 수학여행을 간다는 특별한 이유로 긴 머리 가발을 붙이고 나타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같은 일자 앞머리에 허리까지 오는 긴 뒷머리를 살짝 묶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20년도 지난 지금 친구네 집에 가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가전용품들이 많은데 그것들을 볼 때면 17살 때 전교생 중 혼자 가발을 붙이고 나타난 친구의 신박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 친구는 선구자였다.
<EP 5>
"으악 어떡해 저기 오빠다 오빠야!"
"아 저 오빠야? 별론데?"
남녀공학이었지만 합반은 아니었던 우리 학교는 짝사랑의 성지 같았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가, 화장실을 가다가,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그 오빠를 보다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저 소리 ㅎㅎ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 춤꾼이었던 한 학년 선배를 좋아했다) 짝사랑하는 남학생을 향한 여학생들의 목소리. 설레고 흥분된 마음을 들킬까 봐 생쥐처럼 찍찍 거리며 옹기종기 모여 몰래 훔쳐보느라 정신없었던 날들. 친구들의 들뜬 목소리와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레이저를 한 몸에 받았던 오빠 중에는 잘생긴 것은 덤이요 연기까지 탁월한 대배우가 된 오빠도 있다. 그 배우를 스크린 혹은 인터넷 상에서 볼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 통바지에 뱅글뱅글 돌아가던 안경을 썼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남들에게는 한낱 해프닝이자 에피소드인 이 이야기들은 내게는 보석과도 같은 기억이자 추억들이다. 결국은 이 모든 에피소드가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내가 됐으니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운동장 옆 나무 아래에 전교생들은 다 함께 모여 타임캡슐을 묻었다. 10년 뒤 혹은 20년 뒤 함께 모교를 찾아 다시 타임캡슐을 열어보자고 약속했건만 지켜질 수 있을지 미지수다. 드라마 '그해 우리는'을 보면서 웃고 울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꼭 남자 친구가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맘껏 싸우고 화해하고 짝사랑에도 빠져보았던 모든 기억들이 떠올라서 그런 것 같다. 시간이 한해 한해 쌓여갈수록 누군가와 맘껏 싸우는 일도 쉽지 않다. 어렸을 때의 순수한 마음은 한구석에 고이 닫아두고 이상한 오만과 편견이 커져간다. 그리고 조금은 철이 들어 보이는(?) 모습을 장착하며 산다. 난 현재 가감 없이 마음을 표현하는 그해 우리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대리만족 중이다. 벌써부터 이 드라마가 종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무척 아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