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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H Dec 06. 2023

베를린, 겨울, 감수성의 물음

당신은 당신 감정과 얼마나 솔직하게 마주하고 있나요?

 베를린의 겨울은 사랑하려 해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계절이다. 나는 이전에 이 도시의 추위에 관하여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도시 그 어느 거리에 숨어도 피할 길이 없는 겨울 베를린의 우중충한 날씨는 영국의 부슬부슬 내리는 비나 북극의 폭풍과는 다르다.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갈등 속 형성된 낡은 표현과 정체 모를 선입견이 집어삼킨 도시. 눈을 가리는 희부연 물방울 틈을 가로질러 살을 에는 이곳의 바람은 혹자에게 오늘날 이곳의 동적인 기운 이면에 숨겨진, 정적인 장소에 아로새긴 지난 세기의 희로애락을 체현하는 과거의 냉수로 작용하곤 한다.


 다시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글에 빠진 나날이지만, 감히 나의 얄팍한 문학의 소양을 뽐내거나 평가받을 요량으로 타자하지는 않는다.


 지난, 독일 여러 도시에 각자 시간 계획에 맞추어 한바탕 눈이 흩뿌렸다. 대회 구조의 상하위를 막론하고 축구 경기가 대거 연기되면서 보이지 않는 선을 타고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간 모양새다. 대기 중에서 찬 기운을 만나 얼어버린 저 하얀 물의 결정체가 떨어져 땅을 덮을 때면, 한 번쯤 떠오르는 한국에서 일이 있다.


여름의 안할터 반호프(왼쪽)와 겨울, 눈 쌓인 안할터 반호프(오른쪽)


 어릴 적, 한 또래 친구를 만났는데,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그 친구가 "봐, 빨간 차도 노란 흙도 다 하얀 이불을 덮고 있어!"라며 신이 나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자신이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데 그보다 훨씬 서투르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이 짧은 순간은 내게 제법 충격적인 하나로 남아있다. 아직 내 한국어가 부족하기 짝이 없었지만, 절대 자각한 결핍의 원인이 언어의 문제에 있지는 않았다. 친구의 눈동자에 순간 빨려 들어가 그대로 액자에 걸린 그 날것의 장면이 내 눈에 비친 그와 달랐을지 모른다는 말도 설득력을 얻지는 못한다. 구태여 장치의 차이를 찾는다면, 친구와 나의 필터가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필터는 각자 삶의 힘으로 귀퉁이 하나하나 깎아낸다는 특징을 가진다. 여기서 '깎아낸다'라는 현재형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몇 달간 바뀐 일상에 적응하느라 발이 뜸해졌지만, 어느 지역에서든 미술관을 즐겨 찾는다. 그림 한 점 한 점 담으며 순간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함이다. 어쩌면, 앞서 고백한 어릴 적 한국에서 작은 충격에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함께 발을 옮기며 그 자리에서 감상을 나눌 친구가 있으면, 더 좋다. 아직 기억 저편에 보내졌다가 인식하지 못한 가공을 거쳤을 가능성이 영에 수렴하는 "첫 번째 이해"입 밖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은 쉼이 부족한 현대인의 "마를 대로 말라 버린 감수성 곳간"을 조금이나마 채워 주는 훈련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감정을 온전히 성찰한 뒤에야 다른 이의 감상에 내어줄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데, 물론 그가 어쩌면, 웬만한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우리는 각자 가장 깊은 곳, "나"를 진솔하게 마주하는 일에 이보다 서툴 수 없다. 심지어 때로는 옆자리 다른 사람의 말에 기계처럼 응답하는 일보다도 못한 듯하다.


 대신, 유례없는 기술 발전의 현상을 관통하는 우리 세대는 지금껏 전혀 다른 영역에서도 왕왕 그랬듯, 훨씬 더 쉽고, 빠른 길을 찾아냈으니, 소셜 미디어를 타고 각자 가상의 우체통에 들어차는 소위 "밈"을 가리킨다. 단,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내 감정을 차분히 정리하는 일에 비하여 밈을 '대안'이라 부르기는 적합하지 않은데, 한두 번 손가락을 움직여서 친구에게 유행하는 문구, 사진이나 영상 등 시각 자료를 보내는 일만으로 감수성을 살찌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소셜 미디어의 개인 우편함을 열면, 그날 공유받은 여러 개의 인터넷 밈을 볼 수 있다. 종종, 아니, 어쩌면 그보다 자주, 어떠한 말도 없이 영상만 배송돼 있기도 한데, 특기할 점은 가까운 사람과 하는 창구일수록 빈도가 높아지 한다는 점이다. 이모티콘을 초장에 배제하고, 설령 문자로 된 친구의 흔적이 함께 보내졌다고 해도, 그 문학적 표현의 다양성을 따져 보면, 빈한하기 그지없다. 여기서 문자는 양방향으로 흐른다고 보기 힘들다. 영상 하나를 접하고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이해가 또 다른, 2차, 3차 이해의 자양분이 될 기회조차 얻지 못하니, 나의 이해조차 머릿속 외로운 공명에 그쳐, 저장공간을 오래 차지하지는 않으리다.


 릴 적의 충격으로 돌아와, 눈은 하얀 솜이불이 될 수도, 솜사탕이 될 수도, 구름이 될 수도, 심지어는 두부가 될 수도 있다. 숫자로 기록되는 나이가 한참 커진 뒤에도 동심을 잃지 않은 이의 정신이 건강하다는 말 어디선가 들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 마음은 때가 타지 않은 순수한 표현을 달리 가리키곤 하는데, 대개 이 동심세월이 지나서 차츰차츰 "잃어버린다."라고(마치 자연스러운 현상인 양, 개인에게 책임을 거의 두지 않으며) 하지만, 실은 세상을 읽을 때 쓰이는 필터를 자신이 꾸준히 깎아서 변형시킨 결과물이 그 상실일지 모른다. 표현하기를 부시하는 환경에서라면, '동심의 필터'에서 빠르게 가장자리 조각을 걷어낼 가능성이 크겠다. 더 감수성이 풍부한 사회를 위해, 상호 동기 부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미디어에서 자주 떠들어대는 Z세대의 특징이 "그 어느 세대보다 자기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표현에 거침이 없다."라는 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베를린의 겨울, 지난주에 쌓인 눈에서 출발해, 나는 우리 세대가 숨김 없이 자기감정을 마주하고, 그를 적확하게 묘사하는 일에 얼마나 능숙한지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은 당신 감정과 얼마나 자주, 얼마나 솔직하게 마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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