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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ful Jan 26. 2024

#2 영어 학습과 정체성

영어만 하면, 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내가 튀어나온다?

정체성을 언어교육 또는 영어교육 맥락에서 살펴보는 시도는 잘 없었다.


학부 영어교육론 수업의 기억을 어렴풋하게 더듬어 본다. 그러다 교양필수 과목으로 들은 대학영어 첫 시간이 떠올랐다. 모두가 어색해하며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영어 이름을 함께 소개했고 영어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한국말을 못 하는 원어민 교수님을 향한 배려였는지 혹은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시간에 요구되는 ‘미국-스러운(외향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extroverted and self-confident)’ 태도로 전환하기 위한 신호가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PLLT류의 영어교육론 교재에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정의적 필터(Affective filter)가 높아 영어로 말하는 것이 불편한 학습자에 대한 처방으로 영어 이름을 지어주어 원어민의 정체성을 심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일종의 담론에서 비롯된 관행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언어사용과 언어교육을 사회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연습을 한 달 정도하고 나니 비로소 당시(90년대 – 2000년대 초) 영어 이름을 짓던 유행이라는 관행 속에 작동하고 있던 담론이 보이는 것도 같다.


1990년대 영어교육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자유무역이 장려되고 세계화와 다국적 기업의 팽창이 세계 곳곳에서 태동하던 시절,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거나, 외국계 회사의 원어민과 소통이 가능한 것을 의미했다. 영어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난 유창한 학습자는 다국적 기업에 취직하거나 국제교류 현장에서 쓰임 받을 수 있는 글로벌 인재로 여겨졌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에서 그려지는 영어 소통의 장면들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회사의 여직원들은 승진과 성공을 위해 영어 토익 점수를 올리려 노력한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95년이다.)



영어교수법의 패러다임이 의사소통중심 영어, 맥락화, 개별화로 문법중심 교육을 탈피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영어교육에서 의사소통의 목적은 자기표현(정체성을 드러내고 그대로 인정받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을 원어민이 알아듣느냐, 말이 통하냐에 달려있다. (원어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영미문화 교육도 열풍이었다! 그런 맥락에선 바트 심슨을 모르는 영어 학습자는 영어를 찐으로 배우지 못한 것!으로 개념화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현재는 영어교육이 "서로 다른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광의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개념이지만, 90년대에 영어교육의 목적은, 원어민과 무리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며, 성공적인 영어 의사소통의 지표는 원어민이 나의 말을 알아듣고, 따라서 우리 회사의 외국인 바이어와의 거래를 무사히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Peirce(1995,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의 배경과 같은 년에 출판 됐다)의 놀라운 점은 이런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주 배경의 영어 사용자/학습자의 언어 사용의 양상에 주목하며, 개인의 인지적/심리적 차원에서 결핍이나 실패로 환원되던 영어사용을 사회적 정체성과 이에 따른 전략적인 선택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 언어학적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져와 봤다.


[원문 해석, DeepL 사용]
 " 위든의 연구는 주체성 이론에서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권력을 연결하는 엄격하고 포괄적인 방식에서 다른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연구와 구별됩니다. 위든(1987)은 주체성을 "개인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와 감정, 자신에 대한 감각, 세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합니다(32쪽). 또한 그녀의 연구에 영향을 준 다른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가들(데리다, 라캉, 크리스테바, 알튀세르, 푸코)과 마찬가지로 위든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 분석에서 언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실제적이고 가능한 형태의 사회 조직과 그 가능성이 있는 사회적, 정치적 결과가 정의되고 논쟁되는 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 즉 주관성이 구성되는 장이기도 합니다."

- Social Identity, Investment, and Language Learning, pp.14-15.
retrieved from https://www.jstor.org/stable/3587803



어려운가? 쉬운 예시를 들어보겠다.

영어 시간에 항상 소극적이고 조별 활동에 참여도 잘하지 않는 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상황을 인본주의적 가정( 인본주의적 가정은, 개인이 본질적이고 고정되며 일관되는 어떤 특성을 고유하게 지니고 있고 그것을 정체성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으로 분석한다면,


 “영희는 영어 학습 동기가 부족하네. 영희의 흥미에 맞는 주제를 가지고 영어로 대화하도록 시도해 봐야겠다.”, 또는 “영희한테 영어 공부하는 것이 대학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줘야지. 그럼 영희의 영어학습과 소통의 동기가 생길 거야!”


가 해법이 될 수 있다.


영희는 내성적이고 동기가 결여된 평면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문제의 원인은 개인(영희)에게 있다. 언어학습의 실패는 영희의 탓으로 여겨진다. 영희라는 이름 대신 ‘동양인’ 또는 ‘한국인’을 넣어 보면 어떤가?


 “영어 수업시간에 보면 한국인들은 말을 안 해. 한국인들은 소심해.”


와 같은 본질주의적 해석으로 인종과 민족성의 편견을 생성하는 위험한 거름으로 역할했을 수 있지 않는가? 영어 의사소통능력을 개인의 인지적 심리적 차원의 협의로 정의한다면 단지 그 개인의 성격과 성향과 같은 personality variable만이 고려 대상일 뿐이다.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 종교적 배경을 가진 학습자들이 영어로 소통하기 위한 동기가 부여되는 상황, 외향적이게 “되거나” 자신 있게 “되는” 상황이 언제인지, 거꾸로 불안감이 높아지거나 사기가 꺾이는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분석이 부재한다. 문화적 배경 차이나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다층의 권력관계와 같은 구조적 사회적 변인들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러나 주체를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포스트구조주의적 존재로 규정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영희는 대화와 토론 협력을 통해 수업을 하는 학습문화에서 자라지 못했었고 민주적 참여적 수업으로 여겨지는 방식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게다가 조원들은 영희를 빼고 모두 남자아이들이었다. 따라서 영희는 꼭 필요할 때만 혹은 자신이 편안할 때만 영어로 말하기를 ‘선택’ 한다.


이 상황에서 영희의 발화라는 영어교육 참여의 결과를 ‘개인의 실패’,’ 결핍’,으로 정의 내리는 것이 복잡다단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학습자의 정체성을 역동적으로 생산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구조와 작동하는 힘의 불균형을 포착할 수 있으며 그때부터 우리는 교육적 개입의 탈 중심화를 이야기하고 개입 방향을 다양하게 전환하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영어를 발화하는 상황에서 권력관계의 작동은 어떤 양상으로 발생하는가?


이는 이주배경을 지닌 영어 학습자가 아닌 한국 공교육 영어교육 맥락에서도 유효한 논의이다. 학생과 교사 사이 또는 학생들 간 1) 언어 지식의 수준 차이/ 언어 능력의 차이에 따라 권력관계가 작동할 수 있다. 또한 2) 또래 간의 인기, 학교에서 인정받는 정도, 사회경제적 지위의 차이에 따라 힘의 역학관계가 작동할 수 있다.  


영어가 lingua franca로 정의되어 사용되고 세계화, 다문화 맥락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맥락으로 변화한 만큼 기존의 개인 중심 언어습득 관련 이론에서 벗어나 얼마나 교실이 경직되어 있었는지를 짚어내고 사회언어학적 함의가 주류 영어교육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변화가 필요하다. 영어교실 혹은 영어사용 공간에도 비판교육학이 들어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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