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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로링 Aug 31. 2024

나의 봄을 가꾼 정원사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두 분이 그리울 때면 


"이미 살 만큼 살았응께, 막 슬플 일이다냐. 사람이란 것이 다 살다가 갈 때 되믄 가고 하는 것이제."


언젠가 마주하게 될 당신의 부모님과의 작별을 물었을 때 엄마는 꽤나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 많이 슬프지도, 그렇게 많이 눈물 흘리지도 않을 것이라 했다. 그것은 부모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자 평생을 병마와 싸워온 환자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만 했던 문인이자 또 다른 분신을 키워내는 어미라는 네 가지의 자아가 뒤섞여 꽤나 지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1년, 봄의 끝자락에 외할머니는 봄이 안녕을 고하듯 긴 산책을 떠났다. 나는 살면서 그 때 가슴을 치며 무너지는 엄마의 모습을 처음 봤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기도 쑥스러운 듯 매번 '어이' 하면서 부르던 엄마가 시뻘건 눈으로 울며 '엄마'라고 부르짖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할머니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사랑한단 말도 하지 못한 채였다.


부부의 연은 생각보다 지독한지라 딱 일 년 뒤인 지난해 외할아버지도 세상을 뜨셨다. 온 몸이 바스라질듯 고통 속에서 병원에 실려갔던 할머니와 달리, 차도가 있을 법한 노환으로 입원하셨던 할아버지는 원망스럽게도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세상을 뜨셨다. 중환자실에 실려가기 전 엄마는 외쳤다. "아부지, 다 나았응께. 다 끝났응께 얼른 가요이. 좀만 버티시요. 금방 집에 갈랑께. 알았제." 엄마가 말한 그 집은 낡고 좁은 아파트가 아닌 할머니가 묻힌 눈부신 초록의 공원묘지가 됐다. 그 묘지에서 엄마는 살아 생전 두 분이 드시던 두유를 뿌리며 또 울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내게는 천금 같은, 생명 같은, 부모 같은 것이어서 나는 아직도 그 슬픔을 모두 감당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하물며 엄마에게는 정말 부모여서 그 슬픔의 파고가 얼마나 높을지 알 수 없다. 애증과 사랑과 회한으로 사무친 그리움이 언제나 엄마의 가슴을 꾹 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쪽 다리를 잃은 외할아버지. 그 사이에서 태어나 시인의 길을 택한 엄마. 외할머니는 그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가난을 모두 고행처럼 이고 갔다. 넘치는 정과 문학의 이상에 사로잡혀 현실 감각이 없던 외할아버지에게 평생 분노했겠으나, 그럴 틈도 없이 할머니는 일하고 돌보고 살피고 결정하는 모든 일들을 척척 해 나갔다.



한 때 철없는 딸이 아픈 몸을 핑계로 소리를 질러 대도, 그 덕에 고스란히 손녀의 양육까지 자기 몫이 되었어도 불평 한 마디 없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엉거시 억센 얼굴로 사내가 된 여자"라고 썼다. 생신도 제대로 챙길 형편이 되지 못해 싸디 싼 은가락지 하나만 끼워 드려도 좋다 하시던 할머니, 한겨울 새벽녘 봉고차에 실려 비닐하우스에서 깻잎을 따고 돌아오던 모습, 죽음이 가까워지며 흐릿한 정신 속에도 "채리가 왔냐"고 행복해하던 짧은 미소, 그 모든 것들이 울렁이며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다.


외할아버지는 평생을 우리에게 무언가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방 안에만 갇혀 살면서 세상을 보는 나름의 방식을 터득했으리라. 매일 뉴스를 보고, 신문을 필사하고, 책의 글귀를 엮어 노트로 건네 준 것만 수십 권이다. 그 방식에 삶의 여유가 없는 할머니와 엄마는 간혹 짜증을 냈지만, 내게는 그것이 참으로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나라면 원망으로 가득 찼을 생을 건강하게 보내고 채우는 모습을 존경했다. 엄마가 가난한 시인의 길을 택한 것도, 나 역시 말과 글을 쓰는 일을 직업을 갖게 된 것도 분명 할아버지의 영향이 지대하리라.


이제 가족이라곤 나와 엄마밖에 남지 않은 지금, 우리는 우리만의 소박한 방식으로 두 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매일 따뜻한 밥을 두 분의 사진 앞에 올리고, 두 분에게 헌정하는 시를 쓴다. 나는 두 분과의 결별을 상징하는 타투를 몸에 새기고, 흰 나비가 날아다닐 때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분이 그리울 때면 나는 아직도 아이처럼 한바탕 울고 나서 그래도 거기선 아프지 않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부재를 견딘다.


나와 엄마가 먼 훗날 두 분을 다시 만나면 "아이 밥 다 됐다 어서 오니라" 하며 반겨줄 것이란 마음을 간직한 채로.


*2023.02.26 <매일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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