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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운 Apr 08. 2024

결혼은 안 하고 싶은데 아이는 낳고 싶다는 친구

왜?


부부싸움이며, 시댁이며, 결혼이 꽤나 피곤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의 친구 한 명이 그런 말을 했다. 자기는 결혼은 안 하고 싶은데 아이는 낳아 보고 싶다고. 아이 키우는 것도 무지 피곤한 일인 걸 아는 나는 왜냐고 이유를 물어봤다. 그 친구는 ‘늙어서 외로울까 봐’라고 대답했다.



흔히 생각할 수 있을만한 이유였다. 나도 그 친구의 말이 아니었으면 무의식 중에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다. 내가 늙었을 때 외롭지 않게, 나이 들어 자식이 없으면 허전할까 봐, 지금 아이들을 키워놓는 거라고.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고,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친구에게는 “아하, 그렇구나~”하고 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덧붙이고 싶은 말이 나도 동감한다는 내용은 아니라 친구 입장에서 달갑게 들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못한 속마음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보려고 한다. 그 친구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고 각자 삶의 이유와 의미가 다른 것이니까. 자식을 ‘연금’이라고 표현하는 사람까지 있는 마당에, 늙었을 때를 생각하는 모습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 친구는 부모의 입장으로 꺼낸 말이었을 텐데, 나는 자식의 입장에 이입해서 들은 게 시작점이다. ‘늙어서 외로울까 봐’라는 그 말이, 스쳐 지나갔을 만도 한 평범한 그 말이,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부모님께 얼마나 잘해드리고 있었지? 마음은 굴뚝같아도 나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못 해드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내가 자식을 키우는 이유에는, 자식에게 부담이 될 만한 이유를 빼기로 했다.



슬픈 이야기지만 고독사하는 노인들이 전부 자식 없이 살던 분들은 아닐 것이다. 배우자가 있어도 외로울 수 있고, 자식이 있어도 외로울 수 있고, 부모가 있어도 외로울 수 있다. 난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홀로 설 수 있게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휘청거리다가도 다시 꼿꼿이 일어날 수 있게, 내가 흔들릴 때 지탱해 줄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담을 줄 것 같은 이유를 빼고, 새로운 이유를 찾기로 했다. 성인이 된 아이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나를 키우기 위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운다면 더없이 이상적이겠지만 그러기엔 양육은 너무 고된 일이라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 이유를 찾고 싶어 진다. 이유나 목표가 있어야 더 힘이 나는 법이니까.



‘나를 키운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나의 범위를 넓힌다든지, 내 세상을 확장시킨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성장을 말한다. 아이로 인해 안 사본 물건들을 사고, 갈 일 없었던 장소를 찾아다니고, 유치한 공연들을 보고, 아이가 아니었으면 접점이 없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지는 것, 아이를 통해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고, 수많은 부모들에게 공감하게 되고, 아이가 없을 땐 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은 깊어진 내면, 아이를 통해 넓어진 관점, 아이로 인해 생겨난 인맥, 이 모든 것들을 ‘나의’ 삶에 이용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키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혼만으로도 물론 이런 경험들을 할 수 있다. 배우자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전보다 넓어진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혼자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나 선택을 할 때가 있으니까. 반려동물만 키우게 되더라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다 아이를 낳고 기르기까지 한다면, 아예 뒤집어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뒤집어지기 전과 후를 모두 겪었으니 전보다 훨씬 더 커진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남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아니 이 세상 누구를 데려다 놔도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만 유일하게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내놓겠다는 선택을 몇 번이고 똑같이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생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생긴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그렇게 할 것이다.) 이런 내 마음만 보더라도 이전의 삶과는 급격하게 달라진 게 분명하다.



내 목숨보다 소중해서 아이들을 키운다. 나를 키우려고 아이들을 키운다. 그리고 아이들의 예쁜 짓을 보는 맛에 키운다. 돌고 돌아 이유를 찾아도 결국 ’나‘를 위한 일이다. ‘늙은 나’를 생각하던 친구와 별로 다를 것도 없다.



그래도 덕분에 나만의 이유를 명확하게 찾았으니, 이젠 아이들이 커가는 걸 보면서 나도 함께 커갈 시간들을 기대하는 일만 남았다. 성장한 나로, 내 살 길을 찾을 것이고, 기회를 잡을 것이고, 능력을 보여줄 것이고, 고난을 극복할 것이고, 혼자서도 행복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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