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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Sep 09. 2021

<10화>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주성철 영화평론가




   ‘언제부터 홍콩영화를 좋아했냐’고 물을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바로 홍콩 소림사 영화들을 봤을 때부터다. 특정한 작품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웃통을 벗은 민머리의 남자들이 물을 긷고 불을 때며 질서 있게 열 맞춰 훈련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았다. 무슨 5살 정도밖에 안 된 꼬마가 그런 삼청교육대스러운 획일화된 장면을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저마다 어렸을 적 서로 다르게 매혹되어 각인된 영화적 ‘원체험’이 바로 내게는 소림사 영화였다고 답하고 싶다. 무엇보다 부모를 잃고 어렵게 소림사에 들어간 주인공이 끝내 강시 복장을 한 청나라 관리와 싸워 이겨서 복수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적어도 당시 내게는 남북통일보다 반청복명이 더 중요한 화두였다. 영화란 결국 누군가가 죽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소림사 영화를 지나 성룡을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낸 뒤(이소룡은 나보다 이전 세대임을 밝혀둔다), 드디어 주윤발을 만나게 됐다. <영웅본색>의 주윤발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위조지폐를 태워 담뱃불을 붙이고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던 그의 등장은 홍콩영화계에 있어 중요한 단절의 순간이었다. 과거 쇼브라더스의 대스타 적룡의 컴백과 신인 장국영의 약진도 주목할 만한 일이었으나, 그 사이에서 주목받은 사람은 결국 집도 가족도 없는 ‘낭만적 루저’ 주윤발이었다. 한국 가수 구창모의 ‘희나리’를 번안한 노래 ‘기허풍우’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신의 드라마틱한 과거를 얘기하던 주윤발의 모습, 홍콩을 떠나다가 어쩔 수 없이 친구를 위해 모터보트의 방향을 틀던 의리의 순간은 단숨에 ‘주윤발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데 당시 한국에는 오우삼의 <영웅본색>도 있었지만 그와 제목마저 비슷한 김용의 『영웅문』도 있었다. 당시 홍콩에서 도착한 1986년의 소설 『영웅문』과 1987년의 영화 <영웅본색>은 한국 대중문화의 지형도를 일거에 바꿔놓았다. 2003년 『사조영웅전』을 시작으로 김영사가 정식으로 판권 계약을 맺고 『신조협려』 『의천도룡기』까지 사조삼부곡(射雕三部曲)을 출간하기 전 이야기다. 그 당시 고려원은 사조삼부곡 3부작을 『영웅문』으로 이름을 바꿔서 출간했고, 그와 동시에 소설 부문 1위에 올랐다. 중요한 것은 『영웅문』과 <영웅본색>이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도착해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영웅문』의 광고 카피는 “기(氣)를 펴라! 대인(大人)이 되라! 웅지를 품은 대자유인(大自由人)으로 거침없이 인간세(人間世)를 살아가라!”였고, <영웅본색>에서 가장 널리 회자된 대사는 바로 송자호(적룡)가 배신당한 것을 알게 된 소마(주윤발)가 육교에서 신문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들려왔던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라는 말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 군사 독재정권의 말기에 도착한 두 작품이 전한 자유와 의리의 메시지가 당대 청춘들의 심금을 울리고 억눌린 마음에 불을 지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김용의 작품들은 그즈음 여러 대학 도서관 대출 목록에서 언제나 1, 2위를 차지했다. 개봉과 동시에 인기를 끈 것이 아니었던 <영웅본색>을 재개봉관에서 구해낸 것도 당대 청춘들이었다. 『영웅문』과 <영웅본색>은 당대의 청춘문학이요 청춘영화였으며, 김용 유니버스의 상상계로서 무림은 암울한 현실계와 분명히 맞물려 있었다. 그렇게 홍콩에서 온 소설과 영화가 1987년 한국의 억눌린 민중의 함성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는 결코 과도한 의미부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오래전 얘기를 꺼낸 것은 『영웅문』과 <영웅본색>으로 홍콩에 대한 사랑이 만개하여,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나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과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이라는 책을 써서 거창하게 작가라고도 불려본 입장에서 1987년의 한국과 2014년의 홍콩을 교차해서 바라보는 마음이 황망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우산 시위’라는 이름으로 불린, 2014년 9월 27일부터 시작된 홍콩 주민들의 시민불복종 운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시위 전개 과정에서 홍콩 경찰이 최루탄과 최루액, 살수차 등을 이용해 진압을 펼치자 시민들이 지참하고 나온 우산을 이용해 최루액을 막아내면서 ‘우산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그처럼 1997년 중국 본토 반환을 전후로 하여 과거의 영국, 현재의 중국에 저항해왔던 홍콩 사람들의 자존심은 여전히 건재하다. 1967년 당시 영국의 통치에 반대하던 반식민시위 양상은 오우삼의 <첩혈가두>(1990) 초반부에 잘 담겨 있다. 홍콩 노동자들의 시위가 격해지며 혼란스러운 가운데 세 청년(양조위, 장학우, 이자웅)은 베트남으로 떠났었다. 서극의 초기 걸작 <제일유형위험>(1980)에서 완전 무장한 영국인 무기밀매업자와 싸우다 급기야 사제폭탄까지 만드는 홍콩 청년들의 광기 어린 혼돈의 모습 또한 당시 시위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순류역류>(2000) 촬영감독이면서, <팔선반점의 인육만두>(1993) 같은 하드고어 장르영화부터 <여왕에서 행정장관까지>(2000) 같은 사회파 영화까지 만들었던 독특한 이력의 구례도 감독도 이제는 홍콩의 향수가 되어버린 <찹쌀볶음밥>(2010)이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를 통해 과거 홍콩 사람들의 시위 장면을 담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홍콩 사람들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섰다.


   “7,000 홍콩달러 월세를 내서 감방 같은 방만 구할 수 있는데, 체포되어 감방으로 가는 게 두렵겠어요?” 지난 2019년 서울 서교동 갤러리 위안에서 열린 ‘신문에 보이지 못하는 전인후과(The True Story behind media coverage)’ 사진 전시회에 다녀온 적 있다. 최근 홍콩 시위대의 투쟁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전시였다. 전인후과(前因後果)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라는 뜻이다. 관광지 웡타이신사원으로 유명한 웡타이신에서 시위에 참여한 누군가가 벽에 위와 같은 글귀를 남겨둔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 아래 설명을 보니 인구 밀도와 집세 등을 고려할 때 홍콩 사람들의 1인당 거주면적은 탁구대 하나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약 100만 원 정도인 7,000 홍콩달러를 들여도 팍팍하게 살 수밖에 없는 홍콩의 젊은이들이 ‘광복홍콩 시대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위에 참여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더불어 2019년 8월 23일, 13만여 명의 홍콩 시민들이 정확히 30년 전 ‘발트의 길’을 본받아 시내에서 사자산 정상까지 최종 60킬로미터에 이르는 인간 띠를 이룬 ‘홍콩의 길’ 사진도 감동적이었다. 발트의 길은 1989년 8월 23일, 당시 발트 3국의 시민 200만여 명이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이르는 총 길이 678km를 인간 띠로 연결했던 길을 말한다. 당시 소련의 점령하에 있던 발트 3국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세계 각국에 보여주기 위해 계획했던 것으로, 시위 7개월 만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공화국 중 처음으로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발트의 길은 세계 역사상 가장 대중적이고 창의적인 비폭력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러, 홍콩 사자산 정상에는 “FREE HK”라는 불빛이 빛났다. 서울 시민들의 남산처럼 홍콩 시민들이 사랑하는 사자산은 오우삼 감독과 제작자 테렌스 창이 할리우드로 진출해 <윈드토커>(2002)와 <페이첵>(2003)과 <방탄승>(2003) 등을 제작하며 설립한 영화사 라이언록 프로덕션(Lion Rock Production) 이름의 출처이기도 하다. 한편,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개정안 논의로 촉발된 홍콩 시위는 코로나19로 잠시 잦아들었을 뿐 근본적으로는 전혀 달라지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홍콩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홍콩 장르영화가 아시아 극장가를 호령하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그 영화들 밑바닥에는 ‘1997년 홍콩 반환’이라는 당시로서는 불안한 미래를 향한 근심이 자리해 있었다. 체제 변화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한편으로는 동시대 홍콩영화의 보편 정서를 과잉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장 고도 자본화된 홍콩 영화산업이 공산 중국을 바라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가 영화의 속살에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된 것일 게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2014년 우산 혁명’이라는 새로운 틀이 만들어졌다. 물론 우산 혁명이 동시대 홍콩영화에 어떤 영향을 줄지, 어떤 모습으로 담길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한국에서 (더는 구분법이 무의미해진) 홍콩영화 혹은 중국영화의 마지막 실질적 흥행작이 2002년에 개봉한 <무간도>라는 것을 감안하면(공식 집계가 시작된 이래 기록상 현재 국내 중화권 영화 최고 흥행기록은 오우삼의 2009년 작 <적벽대전2: 최후의 결전>의 269만 관객이다) 한때 홍콩 스타들이 하루가 멀다고 내한하여 국내 TV 예능 프로그램과 CF를 섭렵했던 옛 기억도 한참 물러나고, 그야말로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편 그 2014년으로부터도 어느새 5년 넘게 세월이 흘렀고 상황은 더 나빠졌다.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이라는 책을 낼 때, 저자인 내가 아니라 출판사 편집부가 냈던 제목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돌이켜보니 정말 잘 지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때의 홍콩과 홍콩영화가 이제는 없기 때문에 계속 음미하게 되는 제목이다. 그렇게 내 영화의 첫사랑을 힘겹게 떠나보내고 있는 중이다.




   <계속>




   주성철 영화평론가

   前 「씨네21」 편집장 

   前 「필름 2.0」 기자 

   前 「키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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