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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Sep 30. 2021

<14화> 어떻게든 쓰는 비법

배순탁 음악평론가




   영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당연하다. 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데 인터넷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벌어진 현상이 있다. 그 어떤 분야든 평론가가 망했다는 거다. 


   그렇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문가의 평 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차라리 네이버 평점이다.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20 글자 평이다. 20자에 불과하더라도 조건은 있다. 핵심을 추릴 줄 아는 근사한 수사학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도 아니면 자극적이어도 괜찮다. 내 경험 내에서 전자는 이동진 평론가가, 후자는 박평식 평론가가 짱이다. 이 둘 외에 20 글자 평이 화제가 된 경우는 글쎄, 적어도 내 기억엔 거의 없다.


   음악이라고 뭐 다를 게 있나. 음악 쪽은 더 심하다. 종이 잡지는 망한 지 오래고, 음악 평론이 소비되는 건 아이돌 (산업) 관련한 멘트를 따거나 글을 쓸 때뿐이다. 간단하게, 주목받지 않는 음악에 대해 써봤자 그 글을 읽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그도 아니면 초 유명한 곡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신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전문가 뺨치는 비전문가가 널려 있다. 자신의 오류에는 관대해도 타인의 오류에는 조금의 관용조차 허락하지 않는 준엄하신 분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눈에 불을 켜고 활동 중이다. 팩트 오류는 곧 죽음이다. 중간은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평론가가 되고 싶어한다. 이쪽 사정 대충 다 알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묻고 싶지만 어차피 내 인생은 아니므로 과한 참견은 금물이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평론가란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평론가는 그 무엇보다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것도 제법 잘 쓰는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지만) 이 책의 공저를 맡은 김도훈, 이화정, 주성철은 평론가 할 자격 충분하다. 진심이다. 글 읽어보면 안다. 


   내가 거절‘왕’이 된 이유 역시 위와 같다. 자랑인 거 같아서 안 쓰려고 했는데 텔레비전이든 뭐든 출연 요청이 꽤 들어오는 편이다. 한데 거의 절반 이상은 반려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글 쓰는 것에 비해 보람이 차지 않기 때문이다. 녹화를 마친 후에도 괜히 했나 후회할 게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한 녹화라면 반드시 오케이한다. 단, 조건이 있다. 가격이 맞아야 한다는 거다. 나, 이래봬도 프로다. 열정페이 따위 개나 줘버려라. 


   대신 원고 요청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지간하면 쓴다고 한다. 이건 선순환을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편이 못 되는 사람이다. 만약 누가 매달 내가 버는 돈의 3분의 2만 손에 쥐어주면 게임만 하면서 재미있게 놀 자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을 해야 먹고 산다. 어찌 운 좋게 풀려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듣기를 직업으로 삼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하는 게 나에게도 이롭다. 그러니까, 원고 청탁이 나에게는 동기가 되어주는 셈이다. 


   우리는 착각을 하고 산다. 취향이라는 게 자가 발전하는 생명체와 비슷한 거라고 오해하면서 산다. 글쎄. 내가 아는 한 꼭 그렇지만은 않다. 취향은 자연발생적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계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약간은 강제가 동반되어야 할 순간도 더러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지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다. 그런 와중에 취향느님께서 갑자기 강림하셔서 “이게 바로 니 취향이니라” 하는 일 따위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즉, 그거 기다릴 시간에 억지로라도 뭘 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실패하면 또 어떤가. 생계에 직접 연관된 문제가 아닌 이상 실패는 교훈이 될 수 있다. 미술 관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괴롭다면 음악으로 갈아타면 된다. 음악 듣기가 영 별로라면 영화로 환승하면 그뿐이다. 그러면서 찾아가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취향이 뭔지를 말이다. 


   나처럼 이미 글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도 강제는 중요하다. 앞서 강조했듯이 나는 꽤 게으르다고 볼 수 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원고 청탁은 나에게 어떻게든 새 음악을 듣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나는 지금도 LP를 사고, CD를 산다. 스트리밍 사이트에 접속해서 신곡 체크를 잊지 않고 하려고 노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듣지 않으면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쓰려면 먼저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평론가라고 직함을 밝힌 지도 어언 10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내가 진짜 글 잘 쓰는 평론가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10년 전과 비교하면 내가 어느 정도 발전했다는 자부심 정도는 느낀다. 여기서 잠깐. 겸손과 자부심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태도다. 둘 중 하나가 지나친 게 오히려 문제다. 전자가 지나치면 호구되기 십상이고, 후자가 지나치면 재수 없는 놈 되기 딱 좋다. 중용의 미학이 역시 최고다. 


   다음은 내가 소셜미디어에 쓴 ‘글 쓰는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지난 10년간 익힌 노하우라고 봐주기 바란다. 도움될 수 있을 것 같아 적는다. 중간에 카메오로 김도훈 씨가 출연한다. 



        ― 무조건 많이 써야 한다. 백날 책 많이 읽어봐야 글 써본 적 드물다면 읽을 만한 글 쓸 수 없다. 절대로 없다. 레알 없다. 누적의 힘이란 참으로 강력해서 많이 써본 놈이 결국 이긴다. 그것도 단지 많이 쓰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해도 될까 말까다.


        ― '~인데'를 여러 번 쓰고 있다는 건 지금 당신의 글이 늘어질 수 있다는 아주 강력한 신호다. A4 한 장 기준 한 번, 많아야 두 번 정도가 마지노선이다. 글의 전압은 대개 단문에서 발생하고, 단문으로 치고 나갈 때 전압이 쭉 하고 올라간다. 확정할 순 없지만 단문 둘에 장문 하나 정도가 이상적이다. 


        ― 같은 어미를 반복하면 안 된다. 나에게 퇴고의 과정이란 곧 어미를 점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미가 반복되면 가독성이 뚝하고 떨어지는 까닭이다. 예외가 없지 않다. 앞서 언급한 단문으로 치고 나갈 때다. 이걸 대한민국에서 젤 잘하는 글쟁이가 (내 기준에) 한 명 있다. 공저자인 김도훈 씨다.


        ― 물음표, 느낌표, 말줄임표 남발하는 글은 멀리하는 게 좋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강조했듯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통찰도 읽어볼 만하다. “아마추어는 말줄임표를 마치 통행 허가증처럼 사용한다. 경찰의 허가를 받고 혁명을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이게 정도(定道)는 아니다. 어떤 책을 읽어왔느냐에 따라 좋은 글에 대한 취향도 갈릴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계속>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배순탁의 비사이드>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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