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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토세무사 Aug 03. 2021

회계팀의 이상한 전통

팀장님, 그건 전통이 아니고 악습이에요.


한 달간의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모두 각자의 팀으로 배정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회계팀으로 입사를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회계팀으로 배정됐다.

회계팀은 나를 제외하고 총 6명이었다. 팀장, 차장, 과장, 대리 그리고 사원 둘.


대부분의 회사는 첫날부터 바로 일을 시키지 않는다. 짧으면 하루, 길면 며칠간은 적응할 시간을 준다.

첫날, 아무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회사의 감사보고서를 주면서 읽어보라고만 했다. 둘째 날도 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있거나 메신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내 일은 생기지 않았다.

반면 동기들은 하나둘 본인의 업무를 배정받았다. 한 달이 지나니 야근을 하는 동기들도 생겼다.


팀으로 배정받은 게 12월 초였으니까 나는 12월, 1월, 2월 총 3개월 동안 일다운 일을 전혀 하지 못했다.

가끔 일손이 필요할 때 도와드린 적은 있지만 '나의 업무'는 없었다.


왜 그랬냐고? 이상한 전통 때문이었다.

우리 팀의 팀장, 대략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그분은 이상한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회계팀에 들어오는 신입에게 일 년 동안 일을 시키지 않았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내 위의 사원도 그랬고 그 위의 사원도 그랬다고 한다.

더 심각한 건 팀장이 여자 팀원과 심하게 내외한다는 것이었다.

말로는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내가 볼 때 그건 조심스러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방관이었고 무시였다.

세 달 동안 팀장과 대화를 나눈 건 팀 배정받은 날, 퇴사하는 날을 포함해 다섯 번도 안 될 것이다.


일도 안 시켜, 말도 안 시켜 아주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출근하면 자리마다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점심 먹을 때 수저를 깔아드리고 물컵에 물을 채워드리고 중간중간 도와드릴 일이 없냐고 물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더 화가 나는 건 앞으로 일 년 동안 이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메신저에 가장 답장을 빨리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할 일이 없으니 몰래 사내 메신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점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동기들이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이 회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안정적이지만 성장성이 낮은 회사였다.

자유여행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패키지여행의 수요가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또 다른 단점은 연봉이 매우 낮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입사원 연봉이 월 200이 안 됐는데 회사 사내 게시판에는 어떻게 신입이 우리보다 연봉이 높냐며 분노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이상한 회사였다.

앞으로 20년, 30년을 이곳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회사와 함께 내 인생도 도태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미래를 그려보며 점점 이곳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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