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부니 달큰한 파 향 가득한 육개장 한 그릇 땡긴다. 울 시어머니 겨울파 들어간 육개장 진짜 맛있는데...
남편이 몇 해 전에 나에게 권해왔다.
"자기야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엄마 육개장 비법은 좀 전수받아놓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권유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단호하고 확실했다.
어림없는 소리!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만드는 음식들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명절 다음날 며느리들이 갖은 스트레스와 독을 빼내야 할 현시점에 할 소린 아닌 듯도 하나, 내가 시어머니나 시어머니의 삶을 경외한다는 정치적 발언이 아니니 오해 마시고...
내가 말하는 경외심은 온전히 어머님이 만들어 내는 음식에 대한 경외심을 말하는 것이다.
명절날 아침
음식이 준비한 노력에 비해 거창해 보이기 위해 사용하는 빌보니 웨지우드니 덴비니 이딴 후까시라고는 하~~나도 없이 밥말기도 어려운 소박한 국사발에 차려놓은 멀건한 국 한 그릇...
미리 끓여놓은 국을 냉장고에서 꺼내 식구들 먹을 만큼 덜어 끓여낸 세상 간단해 보이는 이 육개장 한 그릇은식구들 머릿수만큼 각각의 앞에 놓여 있지만 어린 녀석들은 파 빼고, 토란대 빼고 국물만 좀 떠먹고 고기 몇 점 건저 먹다 남아서 도로 상 밖으로 나가는, 식당에서 메인 시키면 따라 나오는 '쩌리반찬' 같은 취급을 받는 음식이다.
얼큰한 국물에 밥 말아먹는 국밥을 좋아하는 남편이나 겨우 한 대접 뚝딱 비우긴 하지만, 그나마도 두 끼 연속으로 나오면 시들해지는, 명절날 차려놓는 기본 옵션 같은 이 국의 비법레시피를... 난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긴 하다.
여린 고사리 비법 레시피
한여름을 거쳐 억새지기 전,화사한 봄날 아침 공기 좋고, 그늘도 좋은 숲 속 길을 걸으며 (도대체 어딜 다니시는지...)
여리고 이뿐 것만 따다 말려 한 움큼, 한 움큼 모아놓은 고사리는, 시장에서 말리거나 불려 파는 것과는 모양새 자체가 다르다.
시집와서 첫 명절에 시댁에서의 일이다. 어머님이 다듬어 두신 고사리 두 무더기를 가리키며다듬은 고사리 가져오라시는데, 나는 이게 무슨 며느리 테스트인가 싶었다.
난감하던 나는 두 무더기의 고사리를 한참 째려보다 "어머님 뭐가 버려야 할 건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고백했다.
시어머니가 골라 놓은 고사리 무더기 중 먹을 고사리와 버릴 고사리도 구별 못하겠던 그 시절과 달리, 지금은 어머님이 만들어 놓은 고사리의 연하고 순하지만 진한 향을 이제는 입으로도 눈으로도 볼 줄 안다.
아니 사실 이거 나뿐 아니라 우리집 십 대들도안다. 그러니 맨날 학교급식에서 나오는 고사리나물은 할머니 고사리랑 완전 다른 맛이라며 안 먹지... 우리 학교 급식 때도 느끼는 거지만 애들이라고 다 나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맛없는 나물을 싫어하는 거지...
어리고 연한 것들만 가지런히 모아 데친 싱싱한 맛과 향... 그거 사실 내가 서너 살쯤 되는 아이들 밥먹이는 일을 20년 가까이하고 있는 사람이라 아는데 애들이 그 맛을 더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러니 젊은 엄마들은 "우리 애들은 나물 안 먹어요."라고 하지 말고 "내가 맛있는 나물을 만들 줄 몰라요."라고 해야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어머님 손으로 따고 말리고 모아진 고사리가찬바람이 선선해지는 지금... 육개장이 되기 위해
시댁 식창고 한켠에 준비되어 있다.
향긋하고 단 고춧가루 비법 레시피
고추 모종을 심어 자란 하루해살이 한 그루에 한 해 동안 고추가 얼마나 열려대는지 아는가?
대부분 풋고추를 따다 먹고, 또 팔고, 더위가 한창이라 먹다 먹다 풋고추로 딸 타이밍을 놓친고추들이 붉게 익어가면 그걸 따다가 말리고, 태양초라 부르고, 방앗간에 가져가 빻아 고춧가루를 만든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 이런 노력 조차 하질 않지... 고춧가루는 쿠팡에 존재하는 공산품 같은 것...
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고춧가루 넣은 전골을 하실 때마다 이 얘기를 하신다.
고추의 매운맛도 여름을 거치며 고추나무에 열매가 열리고 또 열리며 거세지는 현상인지라
처음 맺힌 열매는 봄날의 고사리처럼 연하고, 달고, 캅사이신 같은 거센 매움이 아니라 기품 있는 매운맛이 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열매인지라 사람들이 그걸 풋고추로 따다 고기와 쌈장과 곁들여 먹어대지 붉게 익도록 기다리질 못한단다. 절대...
어머님 말로는 고춧가루도 고추나무가 맺은 그 첫 열매들을 붉게 익혀야 달큰하고 향긋한 향이 나는
'맛있는 고춧가루'가 된다고 한다.
당연히 나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시어머니 냉장고에 든 고춧가루 병을 따면 항상 다른 데서는 맡아본 적 없는 달큰한 향이 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달큰한 향이 설탕과 고춧가루의 비율 같은 백종원식 레시피인 줄 알았고,또는 우연히 어머님한테는 향 좋은 고춧가루가 얻어걸린 건 줄 알았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 나오는 첫 열매를 취하는 게 하나님의 취향인지 제사장의 취향인진 모르겠으나 그분들 참... 미식가다...
결이 살아있는 양지 레시피
나는 한 끼를 위해 끼니 전 30분이 투자되는 것도 억울해
한 끼에 한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도 식구들에게 엄마의 수고로움을 있는 대로 과시하는 '생색 오지는 엄마'다.
식구들이 한 끼 먹을 음식을 위해 2~3일 전 마련하고 준비해야 하는 일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고 할 마음도 없다.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저렇게 준비된 식재료 말고도 맛있는 육개장을 위해 마련되는 고기는 D데이 2~3일 전에 삶아져야 하고, 불 앞에 기대 서서, 잡내가 나게 하는 부유불과 기름을 수시로 걷어내며 끓이고 또 끓여국물은 맑게, 고기는 푹 익힌 후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그 잘 삶긴 양지를 결대로 찢고 있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일요일 저녁 식구들이 일주일 내내 먹을 양상추와 상추를 씻다가도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데, 차려놔 봐야 메인요리에 따라오는 공짜반찬 같은 국 한 그릇을 위해 저 수고로움을 감수하다간 제 명에 못살고 홧병이 날지 모를 일이다.
지겨워서 여기까지 밖에 못쓰겠다. 마늘은? 토란대는? 내 내공으로는 감히국간장에 대해선 말을 얹지도 못하겠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나의 남편의 어머니가 만드는 육개장의 비법이다. 남편은 아마도 간장 두 숟갈, 설탕 두 숟갈 하는 요리 잘하는 백 모 씨의 황금비율쯤 되는레시피를 생각하며 어머님 살아생전에 나에게 육개장을 배워두라 했을지 모른다. 당연하고도 슬픈 일이지만 자식들은 부모를, 어머니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내가 시어머니의 노고의 산물, 육개장을 경이로워하면서도 어머님께 경외심을 표하지 못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아주는 이에겐 경이롭지만, 몰라주면 미련할 뿐인 삶의 수고들...
남편의 권유 래시피 권유에 나직이 같은 성을 쓰는 세 가족들에게 대답했다.
어머님(할머니) 살아생전에 많이들 먹어둬... 너희 평생에 기억나고 그리워도 절대 다시 먹어볼 수 없는 음식이야!
주책없이 명절날 밥상머리에서 볼품없는 국그릇에 담긴 육개장에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오늘도 우리 집 십 대들은 물색없이 그 위에 파와 고사리를 골라내고 앉았고, 그 꼴을 못 보겠는 나는 그 국 건더기를 다 건져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