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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거 Jul 31. 2023

에너지를 비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에너지방전형 인간의 투잡 적응기

그간 회사 도메인도 얻고, 공식 이메일도 만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획제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어느 정도 있었다. 디자인적으로는 자신이 없었지만, 알맹이만큼은 자신 있었다. 일주일 안에 모든 걸 다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오만이었다. 현생에서 하는 일과 맞물리면, 지극히 현실적으로 현생이 1순위였다. 사업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바쁜 일이 끝나면 한숨 돌리느라 사업은 여전히 2순위였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면, 그제야 내가 너무 안일하게 사업했구나 라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다시 기획제안서를 작성한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면 다시 현생이 바빠지고 작성하던 기획제안서를 잠시 미룬다. 이렇게 도르마무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니 한 달 동안 작성한 기획제안서 2개의 총 완성률이 50%가 채 안된다.


솔직히 많이 부끄러웠다. 하고 싶은 일이니깐 꼭 사업해 봐야겠다며 객기 부린 주제에 행동에는 광기도, 열정도, 하다못해 아주 조금의 끈기도 없었으니 말이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자며 늘 다짐하지만, 여전히 행동에 옮기는 것은 어렵기 그지없다.


계획은 늘 머리에서 충동적으로 세우는 전형적인 P였기에, 촘촘하고도 정교한 스케줄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기획하나 못 따보고, 제안 한 번 못 찔러보고 폐업신고서를 작성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스케줄표를 작성하니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서 모든 힘을 쏟을 필요가 사라졌다. 여러 일에 자잘자잘하게 에너지를 나눠 쓸 수 있었다. 현생의 일이 끝났다고 긴 휴식 시간을 가질 필요 없이 바로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수많은 펌프질을 하는 다 써가는 에센스통 마냥 아주 조금의 에너지라도 비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두 방울 모인 에너지는 사업이라는 내 환상을 어찌저찌 연명해갈 수 있는 힘이 됐다.


앞으로의 사업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힘을 모아 후회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야겠다는 반성 시간을 가져보는 7월의 마지막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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