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밖에서는 녹지 않는 눈
한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을 읽고
자정 무렵 죽은 남자 임선배가 여자 후배 k 집으로 찾아온다. 17년 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이다. 회사는 결혼한 여성을 배려하지 않는 곳이다. 남녀가 똑같이 입사하지만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두어야 한다.
두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회사에서 k가 입사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잘리지 않으려고 투쟁한 이야기, 지금 찾아온 임선배가 위에 있으면서도 돕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또 다른 여자 선배 류경주가 임선배에게 물인지 음료인지를 부어버린 이야기, 그리고 류경주는 교통사고로, 임선배는 암에 걸려 죽는 이야기, k도 결국 회사를 그만두는 이야기이다.
특별한 점은 중간에 삽입된 이야기이다. k가 집에 찾아온 죽은 선배에게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희곡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힐부득, 달달박박 이야기를 광대극으로 만들려고 한단다.
연극에 나올 두 사람은 홀로 암자에 살고 있는 스님인데 눈보라 치는 밤에 길 잃은 여자가 찾아와 재워달라고 한다. 노힐부득은 유혹이 두려워 거절하고 달달박박은 여자를 암자 안으로 들여서 언 몸을 녹이도록 나무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워준다. 그런데 여자가 같이 목욕을 하자고 한다. 다음날 노힐부득이 찾아가 보니 여자도 욕조도 물도 모두 황금이 되어 있더란다. 달달박박 스님은 황금부처가 되어 있다. 여자가 보살이었단다. 그래서 노힐부득도 황금물에 몸을 담그고 황금부처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k는 결론을 다르게 쓰고 싶어서 희곡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포기를 했단다. k는 여자를 소녀로 바꾼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결정이 뚜렷한 눈 한송이가 올려져 있고 녹지 않는다. 소녀가 젊은 스님에게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 함께 해달라고 말한다. 스님은 안 된단다. 소녀가 젖은 몸으로 욕조에서 물밖으로 걸어 나온다. 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데 머리 위의 눈만은 녹지 않는다. 소녀는 객석에 대고 말한다.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악몽을 꾼다고.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일은 진행된다. 시간 밖에서는 눈이 안 녹는다. 온기가 없기 때문이다.
k와 임선배는 이야기를 마치고 창밖을 내다본다. 눈이 내리고 있다. 임선배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평화를.
한강 작가의 작품에는 늘 눈이 주배경을 이룬다. 겨울이고 눈이 내린다. 어떤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떤 때는 눈보라가 치고 앞뒤를 가늠할 수가 없는 폭설로 길이 막힌다. 눈은 죽은 사람들의 얼굴에도 내려 쌓여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도 한다.
이 단편에서는 눈이 딱 한 송이다. 그렇지만 녹지 않는다. 시간밖이라서다. 죽은 사람, 차가운 사람의 얼굴에 내린 눈 한 송이는 언제까지나 녹지 않는다. 그 눈을 머리에 이고 악몽을 꾼다는 소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k와 죽은 임선배는 지나간 삶의 이야기로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저마다 각자의 삶이 아닐까? 그 시대에 거기에 있고, 강한 힘을 지닌 자 앞에서는 약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함께 동참하다가 함께 죽는 것, 그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다른 이념을 가졌다고 죽임을 당하고, 회사 내규에 안 맞는다고 잘리고, 관습에 안 맞는다고 비난을 당하고, 가난하다고 소외되고, 장애가 있다고 차별을 당하고, 약자는 그래서 불이익을 당하고 안에 울분이 쌓이고, 결국 평화로울 수 없는 사회, 나라, 가정,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만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그것이 시간 밖임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그럴 수 없기에 여전히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리라. 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죽은 임선배가 k 후배에게 한밤중에 찾아와서야만 속 시원하게 자초지종을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 안에서는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죽은 남자가 살아있는 여자를 찾아오는 이야기는 소설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현실에서 있는 일이라면 여자는 분명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한강 작가는 소설에서 독특한 인물을 창조해낸다. 또한 꿈을 자주 꾼다. 그것도 악몽을 꾼다.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언제나 슬픈 이야기를 써서 25살 때 한겨레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가 한강 작가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단다.
"슬픈 게 좋지 않아요?"
글쎄! 나는 기쁜 게 좋다. 우리의 삶이 시간 안에서나 밖에서나 기쁨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말씀)
만일 시간 안에서 슬픈 일이 많다면 복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시간 밖에서 영원토록 효력이 있는 커다란 상급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 양적으로 가치있는 상 말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성경 마태복음 5:4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