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사랑하는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한강 <채식주의자>를 읽고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강 작가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한강 작가에게 열광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상금이 많은 큰 상이니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기쁘지만은 않다. 하긴 내가 기뻐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저 한 사람의 독자일 뿐이고 무명작가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몇 년 전,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 한강 작가를 알았고,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기에 <채식주의자>를 읽었고, 거의 하루 종일 울었던 기억이 있다. 울어도 울어도 울음이 그치지 않는 이상한 일이었다. '슬픈 것을 좋아한다'는 한강 작가는 주인공 영혜의 삶에 공감해서 하루 종일 울어주는 독자가 있다는 것이 기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를 읽고 한강 작가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아 보았었다. 그 후 <흰>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두 작품은 <소년이 온다>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흰>은 조금 쉽게 가볍게 읽을 수 있었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과 르포가 섞여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고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처음 읽을 때와는 달리 주인공도 나도 아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세 편의 단편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진 장편 <채식주의자>에서 나는 두 번째 작품 <몽고반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고기를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는 남편과 이혼을 했다. 그런데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지녔다는 말을 들은 비디오아티스트 형부가 처제인 영혜에게 성욕을 느낀다. 영혜의 몸에 식물과 꽃그림을 그리면서 성관계를 한다. 이것을 비디오로 촬영을 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정신도 온전치 않은 처제를 탐하는 것이다.
결국 비디오는 형부의 아내이고 영혜의 언니인 인혜에게 발각이 되고 둘은 경찰서에 잡혀가고 정신과 진단을 받는다. 영혜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형부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물론 인혜와 형부도 이혼을 한다.
언니 인혜는 정신병원에 있는 영혜를 끝까지 찾아가면서 돌본다. 그러나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 싶어 하면서 비쩍 말라간다. 어느 날 사라져서 보니 숲 한가운데 있다.
그런데 이 <채식주의자>가 경기도에서 한때 청소년성교육유해도서로 지정되었다느니, 읽어보니 청소년에게 해롭지 않다면서 청소년권장도서가 되었다느니 어쩌느니 말들이 많다. 심지어는 심리학자들의 의견도 첨부가 되어서 청소년들이 다 함께 읽고 토론을 해도 좋다는 것이다.
만일 신문에 이런 근친상간과 비디오 촬영 기사가 났다면, 돌팔매질을 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없다고, 둘 다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책이라서 다르단 말인가?
내 의견은 그렇다. <채식주의자>는 청소년성교육유해도서가 맞는다. 우리 집에 청소년이 있다면 절대 이 책을 읽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이가 맨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이라는 유명세에 이끌려 어느 서점에서나 구입이 가능한 책을 나 몰래 사서 읽을 수도 있긴 하겠다. 그렇지만 좋은 영향을 미칠 리가 없다. 차라리 야동 비디오를 보라고 하지 싶다. 야동은 나쁜 줄 알면서 본다. 그런데 문학은 감미로운 고급 언어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나쁜 줄도 모르고 읽는다. 도리어 미화되어서 읽힌다. 더군다나 거액의 상금으로 금박을 입힌 맨부커상,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아닌가 말이다. 그게 바로 문제인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사랑도 받지 못한다. 아버지도 남편도 형부도 언니도 그녀의 편이 아니다. 동생 영혜가 18살이 되도록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자라는데 언니인 영혜는 왜 보고만 있었을까? 자신은 매를 맞지 않으니까 괜찮았다는 말인가? 남편과 영혜가 예술작품을 만든다면서 관계를 하고, 그 후 인혜의 가정도 완전히 파탄이 난다. 형부는 왜 하필 정신적으로 연약한, 부서지기 쉬운 처제 영혜를 예술작품의 모델로 삼았을까? 언니 인혜는 동생 영혜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점점 망가져가는 모습에 연민을 가지지만 그것은 그저 의무감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영혜의 입장에서 보면 진정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나는 <채식주의자>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영혜가 망가져가는 모습에 완전히 몰입되어서 그리도 슬피 울었던 것 같다. 실은 나도 남아선호사상이 있는 4대 독자 집안에 맞딸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별로 받고 자라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밖에 모르는 할머니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 때문에 그래도 지금 이만큼, 온전하게 자랄 수 있었구나, 감사하기도 했다. 오래전 고인이 되신 할머니 보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다. 힘들 때면 언제나 찾아가 하소연하면 잘 들어주시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 뵈러 찾아온 사람들이 드린 용돈을 장판 밑에 꼬깃꼬깃 넣어두었다가 우리 애들이 가면 몇 만 원씩 집어 주시면서 장난감도 사고 맛있는 것도 사 먹으라고 하셨던 우리 할머니, 정말이지 할머니가 그리웠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단 한 사람만 가졌더라도 망가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잘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이 부모님이나 부부, 형제자매, 친구나 자녀여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취미 생활을 같이 하는 동호회 사람이거나 집 가까이 사는 이웃이어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