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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Oct 26. 2024

시인가? 소설인가? 읽기가 쉽지 않다

한강 <희랍어 시간>을 읽고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은 한마디로 어렵다. 희랍어도 어려운데,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나온다. 글도 조각조각 분절되어 있다. 이것이 시인가? 소설인가? 누가 주인공인가?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 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희랍어 시간> 책을 펼치면  번째 장에 이런 글이 나온다. 실제로 남아메리카 극단주의 모더니즘 운동가이며 작가인 보르헤스는 실명을 했고, 그의 아버지도 실명을 했는데, 그게 유전이었다고 한다. 나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해서 그 이름도 낯설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선지식을 바탕에 깔고, 그런데 87세의 노인에게 젊은 비서가 결혼을 해서 3개월을 같이 살았다는 이 문장에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아예 초반에 그만두어야 하나 어쩌나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일단 오래전에  한강 작가의 작품을 거의 모두 두면서 이 책도 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기로 한다.


읽다 보니 희랍어 선생과 수강생 젊은 여자의 이야기인가 싶다가 또 희랍어 선생과 여동생의 이야기인가 싶다가 여자의 이혼과 양육권 분쟁 이야기인가 싶다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독일에서의 이야기인가 우리나라에서의 이야기인가도 헷갈린다.  짧은 글들에 번호가 매겨져 있고, 시의 연처럼 줄이 띄어져 있고 시처럼 은유가 담겨있는 문장들이 많다. 소설은 줄글로 쓰인 묘사문장이기에 대체로 술술 잘 읽히는데 이 소설은 읽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야기는 첫 페이지에서 얘기한 것들이 끝부분에서 이루어진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다. 을 포개고 어깨를 안는데 그곳이 침대인지 의자인지 모호하다. 결국 시력을 은 늙은 남자와 말을 잃은 젊은 여자가 정적 육체적 사랑을 나누며 합일하는 이야기이다. 시력과 청력, 말을 다 잃어도, 엄청난 나이 차이가 나는 둘의 사랑은 남아있다고 읽으면 잘 읽은 것일까?


나는 한강 작가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정해보려고 책을 모두 사둔 것인데, 이제 그만 읽고 싶다. 그의 소설에는 정상적인 인물들이 없다. 물론 허구인 소설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이래서 내가 소설을 쓰다가 소설을 안 쓰는 이유도 하다.


누군가 어느 독자인가 작가인가가 장그르니에에게 꽂혀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언어를 다루는 솜씨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소설 <향수> 단 한 권을 읽고는 다시 읽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언어를 탁월하게 다룰 줄 안다. 그런데 소설 초반에 생선 장사를 하는 엄마가 생선 머리를 잘라서 버리는 쓰레기통에다 이제 막 태어난, 자기가 낳은 아이, 갓난아이를 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아이는 목숨이 질겨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데, 후각이 발달되어서 세상의 모든 냄새를 다 맡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일을 하다가 결국 장인이 향수를 개발하는 곳에서 일한다. 소설적인 상상력은 뛰어나지만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비도덕적인 이야기는 읽고 싶지가 않다.


한강 작가의 소설도 그렇다. 내 취향이 아니다. 너무 어둡다. 이혼한 인물들, 사고로 손가락 잘린 이야기, 나라한 성관계 묘사, 죽는 이야기, 자살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는  읽고 싶지가 않다. 인생이 어찌 그런 어두운 면만 있겠는가?


아침에 눈을 뜨면 피를 풀어주는 잠이 있고 달콤한 꿈이 있고,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있고 따뜻한 아랫목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음이 행복하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평범하지만 감사로 이어져간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주말에는 산행도 여행도 할 수 있다. 자연을 맘 느끼고 피톤치드를 들이마시고 내 영혼몸이 새로워져서 집으로 돌아온다. 엔도르핀이 팡팡 솟는다. 감사하고 축복하고 행복해도 시원찮은 이 세상을 어찌 그 어두운 것들과 교감하며 살아간단 말인가?


그 어떤 예술이라도 그렇다. 나는 삶의 빛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좋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보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인내하며 그 어떤 경우에라도 주어진 삶을 끝까지 아름답게 살아낸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만 주어지는 작은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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