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 상담이론을 이야기한 칼 로저스(Carl Rogers, 1902~1987)는 상담 장면에서 만나는 내담자에게 충분히 수용적이고 공감적인 진솔한 분위기를 제공할 것을 당부한다.
내담자 삶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지시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그의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공감을 위해서는 상대방(내담자)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적극적인 경청과 그 마음의 수면 밑바닥까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그 느낌을 적절한 표현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내담자의 삶을 만나다 보면 실제로 상담사가 공감하기 정말 어려운 내담자를 만날 때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의 가해자 부모, 성범죄 혹은 성적인 문제행동과 연루된 학생이 그렇다. 그건 범죄이고 당연히 처벌이나 제재를 받아야 하는 문제행동이기 때문에 상담사인 나로서도 쉽게 그런 행동에 공감하기 어렵다. 마음이 안 간다.
그런 내담자를 마주할 때 나는 나를 인식한다. 난 그를 혹은 그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가.. 마음에서 저항감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그렇다고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거짓 공감을 할 수가 없다(해서도 안 된다) 공감이 안 되니 얼굴빛이 일그러짐을 나 스스로도 느끼게 된다.
이런 내적 갈등으로 힘겨웠던 상담 초기의 내 모습은 어쩌면 현재도 진행 중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이와 연륜이 커지면서 조금씩 무뎌지는 칼날 사이로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을 수용하는 유연함이 생긴 것이 아닐까.
로저스가 말한 그의 형상학적 세계에서 내담자를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생물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진리다. 상담사도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존재이고, 수많은 시간 동안 수련받고 자신을 훈련시켰다고 하나, 자신의 현상학적 세계가 존재하기에 타인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거나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담자를 인정하고 수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담사 개인의 신념이나 믿음일 것이다. 혹은 망상이나 착각,,, 아니면 그것이 진심이고 그것이 내담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의 자기 교만일 수도 있겠다.
섣부른 상담사의 공감으로 내담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거짓 공감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시켜 인식하기 어렵다. 상담사의 영혼 없는 듣기 좋은 말은 내담자의 마음을 결코 열지 못한다.
다만 내담자의 인생에 들어가, 그대로 그 일 자체를 존중한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그 사람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함께 웃고, 함께 울며 내담자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진심이 담긴 공감에는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
비로소 내담자의 마음은 열릴 것이고 새로운 변화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