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8 우연히 만난 시칠리아 속 작은 천국
어느새 신랑이 저기 까마득한 점으로 보일만큼 바다 안으로 들어왔는데 여전히 물은 명치께에서 찰방거렸다. 영화 속, 사진 속에서만 보던 투명하게 빛나는 에메랄드 빛 바다. 그 안에 내 몸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이탈리아 여정 중 가장 선연하게 남은 곳을 꼽으라면 San Vito Lo Capo산비토로카포를 꼽겠다.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할 숙소로 돌아가던 중 동선에 있어 들렀던 아주 작은 해변 도시인 산비토로카포는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의 기억 속에선 시칠리아의 수많은 해변 어느 곳보다 유독 깨끗하고, 빛나고, 서양적(?) 감성을 가득 담은 곳이다.
리조트로 돌아가고 싶던 신랑을 설득해 들른 동네는 너무 귀여웠다. 골목골목 영화 세트장을 방문한 것처럼 새하얗고 앙증맞은 건물이 펼쳐진다. 해변을 포함한 중심부는 교통이 통제되어 보행자만 다닐 수 있게 되어 여행자 친화적이다. 엉덩이가 들썩 대어 서둘러 차를 골목 어귀에 대어달라고 신랑을 재촉한다. 이곳은 주차마저 자유로운 시골 마을이다. 오랜만에 마음 편히 차를 대어 두고 우리는 방향을 더듬더듬 해변 쪽으로 걸어 나간다. 파스텔 톤으로 가득하던 세상이 두 블록을 지나자마자 비현실적으로 선연한 색감의 바다로 이어진다. 해안을 따라 핑크색, 주황색, 파란색 총천연색 파라솔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어떻게 보정 하나 하지 않은 실물이 이럴 수가 있을까. 어디로 눈을 돌려도 꼭 사진작가 요시고*의 컬렉션이 펼쳐지는 것만 같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행복해서!
기나긴 여정을 지나는 동안 매번 신나기만 하던 나인데, 산비토로카포의 해변에서 문득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과도하리만치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면 조금 슬프고 억울해진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곳이 왜 없을까, 나만 모르고 있을까, 아니면 타지인에게는 우리나라의 곳곳이 이렇게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일까, 하며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질투하고 만다.
멍청히 서있는 것으론 이 들뜬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어 해변에 자리 잡기로 했다. 계획에 없던 아름다움에, 수영복도 갖춰 입지 않고 입은 옷 그대로 바다로 뛰어든다. 찬란하고 따스한 볕과 대조적으로 여전히 차가운 시칠리아의 바다에 오늘도 다시 몇 차례 움찔댄다. 그렇지만 너무나 빛나는 바다라 이 순간을 놓칠 수가 없다. 찝찝한 것을 싫어하는 신랑은 나와 가까운 뭍에 파라솔을 빌리고 누웠다. 느긋한 표정으로, 누구보다 행복한 빙구 웃음을 짓고 핸드폰 삼매경인 그를 멀찍이 바라본다. 좀처럼 긴장을 놓지 않는 열심맨의 나태와 방탕을 목도하면 왜인지 마음이 놓인다. 너도 나만큼 내려놓고 흠뻑 즐기길 바라서 종종 조급해진다.
시칠리아 서부 해안은 파도도 그리 세지 않고,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몸을 담기 딱 좋다. 한참을 들어가도 계속해서 배꼽 정도의 높이의 물이 이어진다. 어느새 신랑이 저기 까마득한 점으로 보일만큼 바다 안으로 들어왔는데 여전히 물은 명치께에서 찰방거렸다. 영화 속, 사진 속에서만 보던 투명하게 빛나는 에메랄드 빛 바다. 그 안에 내 몸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파도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행복한 비명소리가 일렁댄다.
바다에서 보니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더 예쁘다. 누군가 가장 예쁜 물감을 자연의 캔버스에 똑똑 떨어뜨려둔 것 같다. 그 뒤로 깎아지른 암벽 산의 모양새도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뜨거운 햇빛을 머리 위에 두고 한참을 눈으로 담다 안 되겠다 싶다. 부러 다시 한참을 뭍으로 나와 핸드폰을 가지고 바닷속에서 바라보던 풍경도 담아본다. 아쉽게도 카메라로 보는 것보다 실물이 100배쯤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신랑과도 나누고 싶어 나는 몇 번이나 신랑을 바다로 데리고 오려 설득해 보지만 - 행복해 보이는 그의 휴식에 단숨에 포기한다.
이제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아 작은 것 하나하나에 자꾸만 큰 마음을 두게 된다. 이 풍경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울컥할 것 같아 일부러 물장구를 치며 마음을 환기한다. 하지만 30대의 체력은 이런 벅찬 감정에도 한계가 있다. 물장난을 겨우 30여 분 남짓 하고 나니 어제보다 한층 쌀쌀한 바람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여행 끝자락에 감기를 얻을 순 없지, 바다에서 나와 볕에 잠시 몸을 말리고 신랑과 식사할 장소를 모색해 본다.
여기가 좋을까, 저기가 좋을까. 한국인 리뷰를 찾지 않고 해외여행에서만큼은 철저히 Google Maps에 의존하던 우리 커플은 이 날도 시각적으로 1차 필터링을 한 뒤, 구글 리뷰를 확인한다. 왜인지 너무 예뻐서 분위기만으로도 4.5점은 주고 싶던 테라스가 예쁜 식당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해가 제법 세지만 부득불 해가 가장 잘 드는 테라스석에 앉는다.
옆 자리에서 시킨 해산물 플레이트가 근사해 보여서 고갯짓으로 메뉴를 가리키자, 환상적인 선택이라며 배우라 해도 믿길 비주얼의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어울리는 화이트와인을 추천받아 함께 시킨다. 이제 이 낮술의 여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더욱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
배우 같은 사장님이 방긋 웃으며 와인잔을 내어준다. 오늘의 와인도 역시나 성공적이다. 시원하게 칠링해 나온 시칠리아의 화이트 와인은 언제 마셔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싱그럽고 산뜻한데, 달지는 않은 이상적인 맛이 있을 수 있지! 이탈리아에서 마신 화이트 와인의 전율은 평생을 못 잊을 것 같다. 신혼의 달달한 감정까지 포함한 이 기분을 우리 평생,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잠시 뒤 나온 해산물 플레이트 마저 놀라우리만큼 훌륭했다. 한국에서는 만나기도 힘들고, 한 점에 몇 만 원씩 한다는 카비네로새우(빨간 새우)회와 달큰한 단새우회, 굴(오이스터), 홍합 스튜, 참치회, 문어, 거기에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시칠리아의 가지 볶음 카포나타까지! 메뉴도 맛있는데 햇살은 달콤하게 찬란하고, 화이트 와인은 여전히 시원해서 - 이 삼합이 꿈만 같다.
동양에서 온 이 신혼부부는
먹을 줄 아는 놈들이군!
우리가 대화도 없이 감탄사만 연달아 내뱉으며 먹는 것에 열중하자, 근방 이탈리안들이 계속해서 따봉을 날린다.
하.지.만.
무방비하게 마주한 행복과 방탕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볕을 직빵으로 쐬었던 한쪽 어깨가 홀랑 타버린 것이다. 이 마저 웃음이 나버린다. 이로서 추억 하나 더 적립이다. 그날 밤 종일 어깨가 화끈거렸지만 이마저 영광의 상처로 여기기로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산비토로카포의 중앙 광장에서 결혼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국과 달리 화려한 색상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에 겨우 열흘 전의 내 모습이 겹친다. 의연해 보이던 그녀도 입장 직전에는 얼굴이 굳어 버린다. '겨우 식'일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깟 식에 심장이 몇 번이고 요동치는게 결혼이다. 설레는 표정의 신랑, 그리고 하객들이 멋지게 차려입고 이들을 축복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 Siamo in Luna di mielle!(우리는 신혼여행 중이예요!)하고 외치고 싶어졌다.
속으로 커다랗게 외쳐보며 대신 그 앞에서 젤라또를 사 먹으며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본다. 당신들의 신혼여행도 우리만큼이나 찬란하길. 반나절도 안 되었던 이 날 우리는 가장 시칠리아다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 우리 꼭,
다시 시칠리아에 오자!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