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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끝, 현실의 시작

EP.09 팔레르모에서 다시 인천으로

by 체리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신혼여행은 그야말로 '여행'이라 앞으로 이어질 나의 '현실' 일상이 기대되고 궁금해진다. 이제 우리의 꿈같은 시간은 끝, 현실의 시작이다.


까마득하던 신혼여행의 여정이 끝을 보인다. 이제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11박 13일의 여정.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도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하다. 이 여정의 하루하루를 온전하게 즐겼기 때문이리라. 후회 없을 만큼 달게 즐긴 꿈이 끝나간다.


요 며칠은 시칠리아의 본때를 볼 수 있게 날이 참 찬란하다. 매일매일 오후 6시 즈음이면 주황에서 핑크 파장 사이 어딘가의 빛이 하얀 건물들 위로 내려앉는다. 피부가 뽀송하게 느껴지는 산뜻한 바람을 맞이하며 오후 나절을 즐긴다. 처음 이탈리아에 발을 내딛던 날, 막연하게 우리를 두렵게 하던 미지의 것들을 모두 체험하고 나니 그저 여유롭게 하루를 즐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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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즐겨서였을까, 조금 더 사진을 많이 찍어둘 걸. 늘 현실에 돌아온 뒤, 후회하고 만다!


드디어 여정 마지막 날.

편안히 쉬는 일정을 꾸리려 부러 리조트 스타일의 숙소에 묵었다. 테니스 코트도 있고, 수영장도 있는 그런 고즈넉한 곳. 나와 신랑은 오랜만에 남이 차려준 조식을 든든히 챙겨 먹고 이런저런 활동을 약속한다. 우리에게 쉼이란 '원래 해야 할 것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해야 할 일들을 벌이는 것'이다. 테니스와 수영으로 하루를 가득 채우기로 한다. 이런 테니스 코트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한국에서는 어찌나 어려운지, 먼먼 이탈리아에서 우리는 함께로서는 두 번째 랠리(?)를 해보기로 한다.


신랑은 테니스를 배운 지 제법 되어 서브도, 토스도 가능한 (내 시야에는) 베테랑 같은 모습이다. 반면 나는 겨우 3개월간 레슨을 받았을 뿐이다. 그것도 주에 1번 버겁게 따라갔던 그야말로 테니스 무지렁이. 상호 레벨 차이가 크다 보니 각자 서브를 한번 넣고 나면 도무지 서로의 공을 받아낼 수가 없다. 나는 나대로 빠른 속도의 공을 받지 못했고, 그는 그대로 초보의 예상치 못하고 튀어나가는 공을 받을 수가 없는 구조다. 우리는 시칠리아의 찬란한 햇살 아래서 열심히 공을 줍다 30분을 보냈다. 랠리가 이어지지 않으면 경기는 더 버겁고 힘든 법이다. 덕분에 든든한 아침이 무색하게 30분 만에 때려치우기로 마음먹는다. 일상 삶엔 포기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데 이렇게 쉬고, 놀고, 먹는 일은 쉽게 때려치워도 되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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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만큼은 제대로인 우리. 한국에 돌아가면 꼭 테니스를 배워야지!


우리는 대신 수영으로 눈을 돌린다. 전날 사둔 차갑게 쿨링 된 샴페인을 마시며 수영장 옆 선베드에 느긋히 눕는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 습도 모든 것이 한국의 그것과는 새삼 달라 오늘도 꿈만 같다. 약 2주간 쫑알쫑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 탓에 더 이상 서로 나눌 이야기도 없다.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핸드폰으로 부질없이 한국 이야기를 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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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Spumante스푸만떼는 꼭꼭 먹어봐야 한다! 샴페인과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의 스파클링 와인.


오늘이 지나면 현실로 돌아간다. 우리는 식 전 합가를 하지 못했다. 그놈의 다음 전세 계약이 쉽사리 성사되지 않아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상황에 처한 나는, 신혼여행 직전까지 극단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전세 대출이며, 보증 보험 따위도 쉽사리 방어책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몇 번이고 소송, 법적조치 따위의 단어를 검색해봤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동동거리던 새, 여행 3일 전쯤 극적으로 성사된 다음 세입자의 계약 덕에 이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인생은 참 단짠의 연속이다. 이 걱정을 덜기 무섭게 당장 이사 스트레스가 이어졌다. 신혼여행에서 돌아간 주에 당장 이사를 해야만 했다. 돌아가면 곧바로 살던 집의 보수를 할 부분도 처치해야 하고, 몇 년을 묵혀 온 짐도 정리해야 한다.


20살부터 기숙사, 이모네 집, 원룸, 투룸 등등 온갖 종류의 거주지를 떠돌며 살아온 나는 이제는 이사가 지긋지긋했다. 2-3년에 한 번 꼴로 드센 삼촌뻘의 아저씨들, 이모님 사이에서 되지도 않는 잔소리를 들어가며 이사를 하고, 또 몇 날 며칠을 저녁 나절 정리를 이어해야 하는 이사를 생각할 때면 한참도 전부터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데 먼 타국에 떨어져 있어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하는 이사라니! 이사를 생각할 때면 이탈리아의 시공간에서 유리되어 다시 현실 속에 콕 박혀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잠시) 아무것도 아니던 문제들이 다시 내 눈앞에 하나씩 속속 세워졌다. 이사뿐이랴, 한국에는 다시 일상의 무게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을 테고 우리는 다시 고민이 산적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미간 주름을 보고, 신랑은 나의 마음을 덜어주려 말을 건넨다.

어쩔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지! 해내야지! 드디어 합가다!

연애 기간 내내 신랑에게 존경하며, 동시에 질투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다. 나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동동거리며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숱한 날을 잠 못 이루곤 했는데, 그는 어떤 문제의 소용돌이 안에 있어도 잠은 잘 잤고 늘 끝까지 잘 버텨내곤 했다. 그런 그의 가벼운 말을 들으때면 나의 고통이나 고민 따위는 철저히 무시하는 것만 같아 왈칵 화가 나다가도, 그의 말이 어김없이 맞아 허탈하게 웃고 만다.


우리의 몸이 아직 이탈리아의 시간대에 놓여있는 동안, 그는 철저히 팔레르모 (발음하기도 어려운) 마가하리 호텔 리조트 수영장 앞 선베드에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다. 나는 다시금 그의 태도와 표정을 따라 해보려 애를 쓴다. 그러면 아주 잠시 그의 마음가짐의 발끝쯤에 미칠 수 있어 힘없이 웃을 수 있다.


맞아, 해내야지!
앞으로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든-


이 단순한 문장을 나는 왜 그리 오랜 시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왜 매일을 아등바등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 채웠을까? 이런 고민들이 꼬리를 물 때면, 어떤 지점에서는 나와 정반대의 세상에 살고 있는 신랑을 만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걸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가 성숙한 다음에 그를 만나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 덕에 한참을 끓어오르던 마음이 화르르 가라앉는다. 그러고 보니 결국에는 이사를 할 수 있게 된 상황이 감사했고, 또 그와 합가를 해 비로소 부부로서 함께할 수 있음을 감사했다. 늘 작은 문제도 태산처럼 받아들여 하루하루가 버겁던 내게, 어떤 문제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는 신랑의 존재는 앞으로의 삶에 제법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IMG_9611.heic 큰 가방이 작은 가방에게 기대고 있는 꼴이 꼭 늘 걱정을 이고 지고 사는 내가 가볍게 훌훌 사는 신랑에게 기대는 모습 같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신혼여행은 그야말로 '여행'이라 앞으로 이어질 나의 '현실' 일상이 기대되고 궁금해진다. 이제 우리의 꿈같은 시간은 끝, 현실의 시작이다.


예전이라면 이탈리아 여행이 끝나서 한참을 슬퍼했을 내가,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앞으로 펼쳐질 한국에서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고마워, 나의 신랑!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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