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그 단짠의 서막,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든든한 지원군이자 전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야 비로소 '함께 사는 공간'이 된 신혼집을 바라보며 우리는 괜한 감회에 젖었다. 이제 진짜 신혼의 삶이야!
신혼여행이 끝났다.
꿈같던 시간의 끝이 아쉬울 줄만 알았는데 인천공항에 발을 내딛자마자 느껴지던 익숙한 냄새와 소음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옛날엔 1년이고, 2년이고 마냥 떠나 다닐 수 있을 것 같던 내가 나이가 들긴 했나 보다. 새로움에 대한 아쉬움보단, 익숙함에 대한 포근함이 날 맞이한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나 단짠! 여정 막바지 나를 숨 막히게 했던 이사라는 과제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국에 도착한 지 4일 만에 이사를 뚝딱 해내야 하는 일정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약 10년 이상의 독립 시간이 켜켜이 쌓여 이룬 거대한 짐더미를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 신랑은 신랑대로 아직 신혼집을 채 들이지 못한 가전과 인테리어 소품들을 들일 것이다. 신랑은 몇 년을 묵혀뒀던 안식월 휴가랄지, 다양한 휴가를 이어 붙여 신혼여행이 끝나고도 3주 정도의 시간을 더 쉬어가게 됐다. 덕분에 평일마다 급작스럽게 시간을 맞춰 기사님들을 맞이해야 하는 성가신 일들을 신랑이 모두 책임지기로 했다.
자기 내일은 주방 맞춤장이 올 거고, 아! 내일 오전에는 옷방 장 조립해 주러 오실 거야!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엔 소파!
엊그제까지 이탈리아에서 있었는데, 한국에서 곧바로 휘몰아치는 일상이 시작됐다. 도대체 이렇게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정을 일반적인 맞벌이 (신혼) 부부들이 어떻게 소화하는 걸까. 우리는 그래도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라 다행이라고 몇 번을 말했다.
새로운 집을 꾸미는 일은 차치하고, 나는 나대로 기존 짐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했다. 낮이면 밀려있던 회사 업무를 정신없이 처리하고, 메일에 답장하고, 오후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와 몸뚱이만 한 50L 쓰레기봉투를 몇 번이고 가득 채워 쓰레기장에 오갔다. 나는 왜 이리 많은 추억과 허물을 끌어안고 미련하게 살았을까. 매 이사마다 1천 리터 이상의 쓰레기 더미를 족히 버리고 나면 매번 다음 집에서는 꼭 미니멀리스트로 살겠노라 다짐하곤 했다. 이탈리아와 한국 사이엔 7시간의 시차가 존재한다. 이탈리아가 7시간 느려, 한국이 오전 7시라면 이탈리아는 자정이다. 몸의 시계가 늦춰질수록 고작 7시간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되어 버린다. 이사와 겹쳐 끔찍한 시차 적응이 시작됐다. 해가 밝은 낮에는 종일 피곤하기만 하다 막상 잠에 들어야 할 11시께가 되면 귀신같이 잠이 깼다. 몸은 너무 피곤해서 자꾸만 땅에서 누군가 끌어당기는 것 같은데, 정신은 또렷해져 미칠 것만 같았다. 눈이라도 감고 있으면 나을까 싶어 1시간이 넘도록 두 눈을 꾹 감아보아도 머리는 또랑또랑하게 굴렀다. 억지로라도 패턴을 고쳐 잡으려다 그냥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그 새벽을 이사를 위한 연료로 삼기로 했다.
복층 침대에서 내려와 다시 짐더미 앞에 앉아 버릴 옷, 잡다구니를 솎아냈다. 새벽에도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환경을 감사하며 몸뚱이만 한 쓰레기봉투를 낑낑 대며 둘러멨다. 매일매일 조급하게 생각하고 쫓기듯 지나도 결국 하루는 지나니까 금세 이사 날짜가 왔다.
아침부터 성격 좋은 이모님과 거친 삼촌이 포함된 이사 팀과 함께 광진구에서 용산구로 나는 비로소 이적을 마쳤다. 드디어 신랑과 합가를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마냥 여행 같고 꿈만 같았던 날들이, 현실로 편입되었다. 완전 포장 이사를 해도, 반포장 이사를 해도 결국 난장판인 집을 정리하려면 한참이 필요하다. 야무진 이사팀이 사라진 자리에는 쓰레기 더미처럼 둘러 메진 샛노란 비닐 자루들이 가득이었다. '해야지!' 하고 굳세게 입을 앙 다물었다가도, 비닐 자루 하나를 해치우고 나면 바로 '아휴 이걸 언제 다하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홀로 한 약 6여 번의 이사, 매번 최종 정리까지 한 달은 족히 걸렸던 일이 이번엔 다행히도 3일 만에 대강 끝이 났다. 든든한 지원군이자 전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야 비로소 '함께 사는 공간'이 된 신혼집을 바라보며 우리는 괜한 감회에 젖었다.
이제 진짜 신혼의 삶이야!
마냥 달기만 했던 허니문 콘파냐 이후, 그와 그녀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자기! 이것 좀 해주라!
자기, 거기 쓰레기 한번 버려줘!
자기! 여기는 쓰레기 무슨 요일에 내놓는 거야?
이미 신혼집으로 이사를 마친 신랑에게 아주 사소한 것들을 낱낱이 묻는 것으로 우리의 신혼 라이프는 시작됐다. 근 10년 이상의 시간을 매일 혼자 선택하고 책임져야 했던 일상이 조금이라도 먼저 경험한 이에게 묻고 기댈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 놀랍고 신기하다. 어릴 적부터 많은 부분을 알아서 해야 했던 K-장녀였던 나에겐 낯설지만 기분 좋은 의지가 되는 그는 나의 신랑이다.
우리, 플라스틱 재활용은 어디에 둘까?
우리, 설거지 담당은 누가 할까?
우리, 빨래는 어떻게 분류해서 할까?
그의 세상에 나의 짐을 모두 들이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논의와 협의를 거칠 것투성이다. 일전에도 언급했던 것과 같이 그는 손이 정말 빠른 '완료주의자'이며, 나는 손이 느려도 꼼꼼하고 야무진 '완벽주의자'인 관계로 쓰레기를 두는 방법 하나하나 달라 하루에도 몇 번씩 쫑알대며 서로의 논리를 말하기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만의 살림'을 꾸리기 위해 최대한 많은 것들을 서로의 의견을 물으려 노력한다. (물론 둘 다 고집이 세서 묻는 것은 곧 설득하는 일로 이어진다)
매일 서로의 고집에 놀라 혀를 내두르는 일상이지만 놀랍게도 콘파냐처럼 달콤했던 신혼여행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신랑과의 동거 기간이 즐겁고 행복하다.
지금까지 그와, 그녀가 각각 느낀 이탈리아 신혼 여행기 <그의 허니문 콘파냐>,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돌아온 지 약 3주가 되어 가요. 저희는 신혼여행이 아닌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한평생 꿈이었던 저만의 (작은) 텃밭을 가진 사람이 되었어요.
괜히 맺음말을 핑계로 신혼여행부터 지금의 일상 내내 든든한 품을 내어준 신랑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모두들 영혼의 단짝을 만나, 조금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가꿔 나가시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
신혼여행에 대한 글은 여기까지.
신부 체리는 신혼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로 이어 연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