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7 시칠리아에서 현지인처럼 사라ㅇ보기
이틀간 먹을 식재료를 야무지게 담고, 선반에서 가장 비싼 시칠리아 와인을 담고도 5만원 내외의 금액을 지불한다. 이럴 때 우린 다시 한번 '우-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서로를 보고 방긋 웃는다. 묵직한 두 손과 한없이 신나는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온다.
꿈같던 와이너리에서의 기억을 뒤로 하고, 우리의 네번째 목적지였던 시칠리아로 떠나는 날. 한 걸음 한 걸음 방긋거리기만 하던 나와 신랑의 얼굴에 점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조용히 쌓인 여독이 종종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음 목적지는 시칠리아! 억지로라도 힘을 내야했다.
와이너리에서 나폴리로 돌아와 차를 반납하고, 나폴리에서 팔레르모로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는 여정이다. 오랜만에 비행기에 오르니 다시금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 새삼 반가웠다. 무엇보다 나폴리에서 훨훨 떠나간다는 홀가분함에 두다리가 가벼웠다. 열심히 투어를 한껏 하고 마지막 목적지인 시칠리아에선 현지인처럼, 아니 유럽의 여행객들처럼 보다 여유롭게 휴양을 하기로 했다.
왜인지 막연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는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서남부에 위치한 제법 큰 섬이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그 아름다운 풍광과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한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제주도 같은 느낌이다. 시칠리아는 동쪽에 위치한 카타리나와 서쪽에 위치한 팔레르모, 이렇게 큰 도시 2곳을 거점으로 나뉜다. 아직도 활동을 하는 에트나 화산의 존재로 여행객에겐 카타리나가 더 유명하지만 나는 화산보다 바다를 택해 서부를 거점으로 숙소를 잡았다.
유럽인처럼~ 칠하게~ 시칠리아를 돌기로 작정했으니 우리의 두 다리가 되어줄 차는 무려 Audi아우디의 SUV 차량으로 골랐다. 어떤 짐이 들었는지 한 톨도 보이지 않을만큼 옹골찬 트렁크에 짐을 실어두고 높은 차체에 오르니 왜인지 뭐라도 된 느낌이다. 약간의 연착과 주차 지옥에서 렌트카를 빼는 몇 차례의 고난을 겪고 나서 숙소에 간신히 도착한 시간은 무려 저녁 10시.
숙소 앞으로는 새까만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조금이라도 보일까 싶어 눈을 한껏 찡그려보지만 새까만 시야 뒤로 쏴아-하는 파도 소리만 돌아온다. 비행기를 타면 짧은 여정이어도 왜 이리 피곤한걸까, 커다란 파도 소리에도 어찌 뭘 할새 없이 짐을 푸르고,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탈리아에 와서는 시차 적응할 것 없이 매일매일 단잠을 잔다. 매일 걷고, 먹고, 감탄하고, 다시 단잠을 잔다. 팔레르모에서의 첫 단잠을 깨니 어제 눈에 담지 못했던 검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스스로를 날씨 요정이라 자부했건만 결혼식 날에도, 로마에서도 온 힘을 다 써버렸나보다. 시칠리아에서의 첫 날인 오늘 아쉽게도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바다에 풍덩 들어가려던 꿈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대신 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연거푸 커피를 내려 마시고 글을 쓰기로 했다. 이건 이거대로 제법 멋지다고, 애써 자위해본다.
다음 목적지는 Trapani트라파니다. 보통 해양 보호 구역으로 들어가는 요트 투어를 위해 방문하는 도시다. 경유지 정도로 여겨지는 곳이라 해당 지역 자체가 좋은 관광 구역은 아니지만 배가 떠난 시간에는 늘 한적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기대 않고 머물러 가는 곳으로 예약한 숙소가 너무나 훌륭했다. 두세 가족이 함께 머물러도 될만큼 널찍하다. 침대를 갖춘 방이 3개, 주방에도 전세계 모든 요리가 가능할법한 장비와 그릇이 구비된 별장 같은 곳이었다. 덕분에 요리하고, 먹고, 쉬며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로 한다. (사실 이제 슬슬 이탈리아의 레스토랑 음식이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내에서도 토양이 비옥하고 날이 좋아 좋은 식재료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그 덕에 마트에 들러 푸르르고 빨갛고 하얀 재료들은 잔뜩 집어 담아도 참으로 저렴하다. 유럽이 생활 물가는 싸다더니 물건을 들출 때마다 다시금 환율 계산을 해보곤 했다. 토마토, 가지, 양파, 좋은 양젖 치즈, 통통한 올리브, 그릭요거트, 생면 두어가지 등등 이틀간 먹을 식재료를 야무지게 담고, 선반에서 가장 비싼 시칠리아 와인을 담고도 5만원 내외의 금액을 지불한다. 이럴 때 우린 다시 한번 '우-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서로를 보고 방긋 웃는다. 묵직한 두 손과 한없이 신나는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온다.
창문이 활짝 열리는 테라스를 가진 숙소에서는, 어느 곳에 있어도 커다란 파도 소리가 자꾸만 넘실넘실 흘러 들어왔다. 파도 소리를 장단 삼아 요리를 시작한다. 오늘의 메뉴는 카치오 에 페페와 카포나타! 로마에서 먹은 뒤로 계속 그리워했던 간장밥 같은 파스타인 카치오 에 페페*(참고)와 이 날 점심에 맛본 야채 요리를 흉내내 요리해보기로 했다. 구글에 찾아보니 맛만큼이나 심플한 조리법이다.
알덴테*로 익힌 면에 품질 좋은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를 솔솔 듬뿍 갈아 넣고, 면수로 그 농도를 맞추며, 신선한 후추를 후추루루루루 뿌리면 끝나는 메뉴다.
처음 해보는 메뉴라 한참을 심각한 표정으로 면수를 넣으며 농도를 맞추는 곁에서 신랑은 샐러드를 만들고 플레이팅을 돕는다. 다행히도 모든 메뉴가 맛있다. 신랑이 골라온 제법 도전적인 생김새의 살라미도 담백하게 짭쪼롬해서 자꾸만 와인을 불렀다. 가벼이 집어 들었던 와인 역시 맛있다. 늦은 시간까지 든든히 먹고 다시 단잠에 빠져든다.
오늘은 '유럽인처럼' 바다 수영을 느적느적 해보기로 한다. 집 바로 앞이 바다, 4-5분만 걸어 나서면 파라솔을 빌려주는 해안가에 닿을 수 있다. 대단히 멋진 바다는 아니었지만 이미 수 명의 이탈리안들이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다. 허연 피부가 어느새 피부가 벌겋게 익었는데도 선글라스 너머로 느긋하게 웃고 있는 폼이 멋져서 나도 한번 이들 곁에서 구워볼까 잠시 고민한다.
물에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는 신랑을 뒤로 하고 나 먼저 바다로 뛰어 들어간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바다가 차가웠다. 이미 저만치 깊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마음과 달리, 들어가며 온 몸이 몇 번을 멈칫거렸다. 한 걸음 들어가 물이 고관절에 닿고, 또 복부에 닿고, 그 다음 명치에 닿는 순간 매번 '꺅-'하는 외마디 비명이 절로 나온다. 그럴 때마다 주변 시선이 잠시 모인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바다 속에서 보낸 시간은 겨우 30분 남짓, 신랑이 내 우스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멍청한 웃음을 지었다.
- 자기 바보 같아!
- 자기가 더 바보 같아!
우리는 끝도 없이, 누가 이겨도 남을 것 없는 다툼을 하고 꺄르르 웃고 만다. 확실히 신혼여행은 휴양지가 제맛이다. 싸워봤자 귀여운 이유의 사랑 다툼이니, 얼마나 어여쁜가. 바다 수영을 한참-하지 못하고 바닷가에서 뒹굴거리고- 서성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짤막한 시간의 해수욕이었지만 몇 주간 기다렸던 순간이다. 발바닥에 까슬하게 붙었던 모래와 하얗게 소금 결정이 말라 붙었던 몸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소금을 씻어낸 물이 입술에 스칠 때마다 짭쪼롬하다. 바깥으론 해가 쨍쨍한데 다시 잠옷 차림이 된 우리는 테라스 너머로 들어온 바닷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각자 할 일을 한다.
아, 정말 행복하다
신랑은 맥주와 와인을 홀짝이고, 나는 이탈리아의 오렌지 과즙이 가득 담았다는 현지 환타를 마시고 늘어지게 한숨을 잤다. 오늘 내 가장 큰 계획이 바다 수영이었고, 이를 해냈으니 오늘 나의 계획은 끝이다. 바다 소리와 바람 소리, 짭짤한 바다 내음이 온 집에 가득인데 나는 자유롭다. 이것이 평화고 행복일까.
자고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식사 시간이다. 시칠리아에서는 매일 메뉴와 상관없이 화이트 와인 한 병을 기꺼이 오픈한다. 이상하게도 시칠리아는 화이트 와인이 어울린다. 그 청량한 햇빛과 산뜻한 마음을 돋워줄 건 레드보다는 아무래도 화이트다. 매대에서 가장 비쌌던 15유로쯤 하는 화이트 와인 한 병과 전날 사온 생면 라비올리를 활용한 요리가 생각보다 훌륭하게 어울려서 또 신이 난다.
아무래도 음식 페어링에
가장 중요한 건
분위기와 감정이다.
너무나 행복하긴 한데, 종일 집 같은 환경에서 함께하려니 부쩍 여러가지 투닥임이 늘었다. 설거지 후 그릇을 놓는 방식, 식기세척기에 커트러리를 넣는 방식, 조리 후 싱크대를 닦는 순서 등 너무나 현실적인 토론이 이어진다. 이건 어쩌면 신혼 생활의 서막일까, 평소엔 미처 보지 못했던 사소한 행동도 반복적으로 보이니 참다 참다 잔소리가 튀어 나간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신랑은 한시간 정도 달리고 오기로 하고, 나는 그 시간동안 마트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마트에서 그 세상을 더 깊이 만나곤 한다. 어떤 식재료가 나는지, 이 곳의 사과는 어떻게 생겼는지, 이 곳의 샴푸는 어떤 기능이 강조되어 있는지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건 이 동네 사람들은 머릿결을 중요시 생각하는지, 탈모를 중요시 생각하는지 등의 정보다), 이 동네 할머니들은 어떤 식료품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시는지, 점원들끼리 어떤 표정으로 논쟁을 하는지 등 마트에 두어시간 머물면 너무나 다채로운 방면에서의 그 세상을 경험할수가 있다.
마트라고 하기도 뭐한 소담한 슈퍼에서 무려 1시간 20분을 서성였다. 이탈리아어로 뭐라고 뭐라고 쓰여있는 치즈들을 붙잡고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본다. 다행히도 이탈리아어는 라틴어 계열이라 대충 읽고 어떤 치즈인지는 파악할 수 있다. 대부분의 치즈가 수가지 브랜드에서 나오기에 그래봐야 느낌적으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치즈를 고르게 되어있다. 오늘 아침 다 먹은 치즈를 떠올리며 새로운 종류의 귀한 치즈를 골라본다. 한국에서 1만원도 훌쩍 넘을 치즈들이 이 곳에선 2유로 내외다. 높은 환율을 고려해도 3천원 내외의 금액이다. 이럴 땐 억지로라도 먹어둬야 이득이라는 생각이 불쑥 불쑥 든다. 나는 벌써 K-아줌마 마인드가 된 걸까?
카트에 담긴 음식은 몇가지 되지도 않는데 오랜 시간을 멍하니 마트 통로에서 보내는 나를 보고, 멀찍이서 신랑이 웃으며 다가온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배기라 했던가, 명확한 싸움의 이유도 없었지만 마트에 들어서기 전까진 이유없이 미웠던 신랑이 마트로 들어선다. 땀이 비오듯 주룩주룩 내린 신랑의 얼굴을 마주하자 마자 웃음이 비실비실 난다. 각자의 바깥 세상을 적당히 만나고 돌아오니 더 좋은 걸수도 있겠다. 다음 이어질 신혼 생활의 힌트를 여기서 잠시 얻는다. 우리는 역시 각자의 시공간이 조금씩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 날 저녁, 다시금 우리는 추가로 사 온 재료까지 활용해 서로를 위한 요리를 차린다. 잠시 떨어졌던 시간 덕분일까, 우리는 보다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진다. 내친김에 신랑 자랑을 해보자면 나의 신랑은 손이 빠르며 엉덩이가 가볍다.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도 '물 마시고 싶다'는 나의 속닥임에 그는 곧바로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간다. 엉덩이 가벼운 남자, 이건 단언컨대 최고 신랑감의 조건이다. 일전의 글에서 '그가 늘 해집기만 한다'고 표현했던 건 살포시 뒤짚으면 그대로 장점이 됐다. 크고 깊게 생각해 시작할 엄두도 못내는 나와 달라, 일단 해보고(실행) 정정하는 그는 일단 뚝딱뚝딱 뭐라도 해서 나에게 내주니 큰 포부와 달리 달리는 체력을 가진 나는 늘 감사히 그의 사랑을 넙죽넙죽 받는다.
그가 해주는 음식을 받아 먹으며, 느즈막히 식사를 마친다. 나보다 먼저 뒷정리를 하는 그를 보며 새삼 내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 복기한다. 옛 말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더니 그 말이 꼭 맞다. 단순히 동반자의 재력이나 집안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표현할 줄 아는 사람과 살면 어떤 사람이건 좋은 방향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어떤 성품과 성향을 가진 이와 함께하게 되었느냐에 따라 여자든 남자든 그 인생은 바가지 뒤짚듯 뒤웅박 팔자가 된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갈 생애에 내가 너에게 좋은 뒤웅박이 되어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우리의 뒤웅박에는 미움과 화보다는, 사랑과 애틋함만 가득 담기길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 나는 결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확인했던 시칠리아에서의 시간들, 너의 사랑과 정성을 기꺼이 받고 아껴 뒀다 언젠가 너에게 돌려주기로 다짐한다. Cook, Eat, Love in Sicily!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