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1)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에서 먹어야 할 것들
한 입 먹어보니 풍미 깊은 치즈 향이 훅 치고 들어오고 그 뒤로 부드러우면서도 심지가 살짝 느껴지는 생면이 씹히는 메뉴다. 얼핏 맛보면 크림소스 같은 느낌인데, 후추 덕에 그보다 훨씬 향긋하고 깔끔하다. 파스타를 돌돌 말아 한 입 가득 넣어두고 토마토소스의 고기 메뉴 등과 곁들이면 정말 맛있다.
여행에서 식문화를 떼어놓을 순 없다. 로마를 기점으로 남부를 돌아본 여행자의 지역별 필수 주문 메뉴를 제안해 본다. 특정 음식점을 추천하고 싶진 않다. 디테일한 부분은 취향에 따라 갈리기도 하고, 이렇게 추천글을 올리는 순간 모든 한국인을 마주하는 장소가 될 것 같아 참으로 조심스럽다. 다만 지역별로 '특정 음식'이 유별나게 맛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 한국에 비하자면 제주도에선 '갈치조림을 꼭 드세요' 정도의 추천 글로 봐주면 좋겠다.
로마는 이탈리아 전역을 기준으로 중부에 위치한다. 이탈리아 모든 문화의 중심지이자, 매년 최다 관광객을 품는 도시답게 여행자 친화적인 도시 문화를 가진다. 덕분에 로마에서는 이탈리아 전역의 음식 대부분을 경험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래 두 개의 메뉴는 로마가 단연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는 로마에서 유래한 파스타 요리다. 이 메뉴는 아주 단순한 원료 구성으로 만들어지는 면 요리인데, 스파게티 면에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양젖치즈)와 후추를 버무려 먹는 메뉴다.
나는 이탈리안 유튜버를 통해 아주 오래전 처음 접했던 메뉴인데, 우리나라로 비교해 보자면 간장밥 정도의 포지션의 음식이랄까. 그 단조로운 구성에 역설적으로 한국에선 찾기 힘든 이탈리아 음식이다.
카치오 에 페페를 직접 먹어보니 더더욱 한국에서 팔기 어려운 메뉴임을 알 수 있었다. 다채로운 토핑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에겐 '이게 뭐야?' 싶은 비주얼이었기에 - 그럼에도 이 파스타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맛있을 수 있다.
<맛있는 카치오 에 페페가 되기 위한 조건>
생면으로 조리될 것
품질 좋은 신선한 치즈를 활용할 것
후추 역시 품질이 좋을 것!
그야말로 원료 본연의 맛과 품질로 승부를 봐야 하는 메뉴인만큼 현지에서 뚝딱 만들긴 쉬워도 해외에서 사랑받기 어려운 메뉴가 분명했다. 카치오 에 페페를 한가득 돌돌 스푼에 말아 입에 가득 넣어 보면, 풍미 깊은 치즈 향이 훅 치고 들어오고 그 뒤로 부드러우면서도 심지가 살짝 느껴지는 생면과 감칠맛이 입 전체에 감도는 메뉴다. 얼핏 맛보면 크림소스 같은 느낌인데, 후추 덕에 그보다 훨씬 향긋하며 깔끔하다. 토마토소스의 고기 메뉴 등과 곁들이면 두 메뉴의 맛을 모두 증폭시켜준다.
로마에서 꼭 이 메뉴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지역에서 흔하게 보기 어려운 메뉴이기에 로마에서 아래로 이동한 다음부터는 찾기 힘든 메뉴였기에 계속 애타게 찾게 됐다. 덕분에 시칠리아로 넘어가서는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 지역에 이르렀는데(?)... 로마에서 맛봐야 오리지널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 로마에서 실컷 맛보고 오기로 하자.
로마를 기점으로 남부로 갈수록 음식이 더 달고 자극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로 로마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젤라또 집들을 만날 수 있었다. 로마의 젤라또는 대부분 '재료 본연의 맛'을 강조한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스크림이란 게 어떻게 만들어도 대부분 맛있겠지만 그 어느 곳보다 담백하면서도 재료 맛으로 꽉 찬 젤라또를 맛볼 수 있는 건 로마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피스타치오', '헤이즐넛' 등의 메뉴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단맛 가득한 인공적인 맛이 아니라 고소한 견과류 풍미로 가득 찬 쫀쫀한 젤라또를 맛볼 수 있다.
남부에서도 두어번 젤라또를 사 먹었으나 로마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도보 관광을 가장 많이 해야 하는 로마에서 젤라또도 실컷 먹고 오자!
미식으로 명성이 높은 나폴리, 사실 이곳에선 대부분의 메뉴가 훌륭하다. 다만 나폴리 사람들은 맛에 진심인만큼 중북부 지역보다 더 강렬한 맛과 소스에 힘을 싣는 듯 하여 종종 로마의 슴슴한 맛이 그립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랑받는 크림 크로와상의 당도가 나폴리가 로마의 그것보다 달달하며, 피자 소스 역시 조금 더 짜거나 시큼한 맛을 자랑한다. (물론 이 마저도 한국에 비하면 슴슴한 수준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피자는 다 같다고 생각하지만 이탈리아 내에서도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특성을 가지는 것이 피자다. 나폴리 피자는 로마 피자보다 더 수분이 많은 반죽으로 장시간 저온 숙성을 통해 도우를 만들어 쫀쫀하고 쫀득한 식감을 가지는 것이 특성이다. 그러다 보니 도우 두께가 비교적 불규칙하고 테두리로 갈수록 도톰하게 올라온다. 토핑도 비교적 제한적으로 클래식한 토마토, 바질, 치즈 등만을 활용한 피자를 더 선호한다고 하니 눈으로도 차이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숙성까지 거친 도우라 토핑 없이 빵만 먹어도 탱글하고 맛있다. 그래서 나폴리 피자는 단조로운 토핑의 메뉴를 먹었을 때 더욱 돋보인다. 나의 최애 메뉴는 단연 화덕에 구운 도우에 날 것 그대로의 치즈, 루꼴라, 프로슈토가 올라갔던 피자였다. 이탈리아를 통틀어 먹은 것 중 가장 충격적으로 맛있었던 음식이다. 그러니 나폴리에 들르게 된다면 꼭 1일 1인 1피자를 하자!
꼬르네또콘판나 Cornetto con panna
프랑스에 크로와상이 있다면, 이탈리아엔 꼬르네또가 있다. 프랑스의 스타일과 사뭇 다른 형태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라빵 형태를 띤다. 버터 페스츄리가 강조된 형태라기 보단 '쫀쫀하게 발효한 빵피'가 강조된 스타일의 크로와상이라 소금빵과 크로와상 사이쯤의 식감을 기대하면 된다.
매대에는 주로 크로와상(꼬르네또)만 놓여있고, 주문 시점에 크림을 골라 채워주는 방식으로 내어준다. 즉석 크림빵이랄까! 대부분 기본 크림 / 피스타치오 / 레몬 or 커피 로 이루어진 3가지 정도의 크림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선호에 따라 골라 시키면 된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남부로 갈수록 음식이 조금 더 자극적이어지는 경향이 있어, 로마의 빵이나 디저트보다 나폴리의 그것이 더 달달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나폴리의 크림이 들어가는 크로와상(꼬르데또콘판나)이 로마보다 적당히 달달하며 맛있었다.
나폴리는 자신들의 식문화에 제법 자부심이 있고 차별화를 두고 싶어 하기에, 커피 역시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나폴리의 커피'이라고 설명하곤 하는데 - 꼬르네또와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빵과 크림의 적당한 단 맛을 쌉쌀하고 진득한 에스프레소가 중화시켜 줘 최고의 조합으로 먹을 수 있다.
어른들에게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를 설명할 때면 '제주도'에 이를 빗대곤 한다. 본토보다 남부에 위치한 큰 섬이라, 뜨거운 햇살과 천혜의 환경을 품은 섬이니까. 시칠리아 역시 제주도처럼 다양한 품질 좋은 식재료가 나고 자란다. 덕분에 '시칠리아 음식'은 토속 음식처럼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랑받는다. 정말 다양한 유명 메뉴가 있겠지만 나는 시칠리아의 이 메뉴들을 추천하고 싶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식재료의 순위를 매기자면 1위가 토마토, 2위가 레몬, 그리고 3위가 가지와 애호박인 듯하다. 특히 이탈리아의 가지는 생김새가 참 특별한데, 한국의 가지가 길쭉하고 애호박 같이 생겼다면 이탈리아의 가지는 보통 타조알처럼 둥글고 큰 형태다. 특히 시칠리아는 과거 아랍과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때 들여온 아랍-남미권 음식 문화가 시칠리아 본토 재료에 적용된 특별한 메뉴가 발전하게 됐다.
카포나타는 그중에서도 단 맛과 신 맛의 결합을 중요시하는 아랍의 향신료 감각, 토마토와 피망과 같은 스페인의 신대륙 재료가 어우러진 달콤하고 시큼한 채소 스튜다. 스튜긴 하지만 레스토랑에서는 주로 많은 양을 조리한 뒤, 시원하게 곁들임 메뉴로 내어주시는 듯하다.
시칠리아 음식으론 주로 '카놀리'나 '아란치니' 또는 해산물 요리 정도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현지에서 생각하는 '시칠리아의 주요 음식'으론 카포나타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많은 수의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에 기본으로 넣어 제공하거나, 오늘의 메뉴 등으로 제공하고 있어 눈만 크게 뜨고 본다면 시칠리아 어디에서든 쉽게 맛볼 수 있는 메뉴다.
처음 맛본 곳에서 대단히 특별한 맛은 아닌데, 자꾸만 사워도우 빵이 술술 들어가게 하는 그 중독성에 단번에 레시피를 추측해 그날 저녁 숙소에서 뚝딱 만들어보았다.
시큼하고 시원한 매력으로 먹는 메뉴라, 야채를 베이스로 하되 추가 재료를 더하더라도 해산물 정도를 넣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나는 내 멋대로 치킨스튜의 형태로 재해석해 보았다. 이 역시 매우 잘 어울려 지금도 이 맛이 종종 생각이 난다. 한국에서 유행한 마녀수프의 느낌과도 비슷한데, 거기에 조금 더 시큼한 맛이 더해져 상큼한 느낌의 스튜라고 상상하면 좋겠다.
야채를 담뿍 먹을 수 있는 중독성 있는 이 메뉴, 이튿날 아침에는 담백하게 야채만 넣고 해 보았다. 양파를 한참 볶아 캐러멜라이즈 한 뒤, 여기에 가지, 토마토, 올리브를 넣고 볶다가 발사믹 식초를 곁들여 한번 더 볶아내면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양파를 넣는 버전이 가장 맛있었다.
포도는 원래 볕이 좋은 곳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칠레, 캘리포니아 등 대부분의 와인 산지가 더운 지역인 경우가 많다. 시칠리아 역시 비옥한 토양에 좋은 볕을 가진 입지니 좋은 포도가 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바다의 미네랄 성분을 머금은 토양 덕에 더욱 미묘한 미네랄 풍미를 품은 와인을 맛볼 수가 있다.
개인적으로 시칠리아 와인의 정수는 화이트에 있다고 생각한다. 섬세한 복잡미묘한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형태기도 하고, 시칠리아의 좋은 해산물과 화이트가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마트에 가면 1만 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아주 훌륭한 와인 한 바틀을 살 수 있다. 어떤 와인을 골라야 할지 영 고민이 된다면 식당에서 메뉴 주문 후 그에 어울리는 와인 추천을 요청하는 것도 방법이다. 예상하지 못해 경이로운 와인이 나오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으니 꼭 도전해 보길 바란다.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빼는 나도 시칠리아에서만큼은 매일 와인을 달고 살았다. 여행이 좋은 건지, 술이 좋은 건지 - 한 번을 숙취 없이 행복한 기분만 얻어 살았다.
시칠리아는 (비교적) 더운 지역인 만큼 얼음을 간 셔벗 형태의 그라니따라는 메뉴 역시 발전되어 있다. 보통 커피맛 / 피스타치오맛 / 레몬맛 / 아몬드맛 정도의 맛을 기본으로 제공하며, 여기에 샷을 추가하는 형태의 메뉴 역시 발달해 있는데 바닷가에서 한참을 일광욕한 뒤 카페에 찾아가면 자연스레 이 메뉴에 눈이 갔다.
셔벗보다 더 서걱한 질감의 그라니따는 한입 가득 먹었을 때 그 얼음 결정이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나는 커피 맛을 골랐고, 신랑은 처음 보는 이름의 메뉴 gelsi(젤시)를 시켰다. 이는 한국의 '오디(뽕)'와 같은 과의 과일이었는데 그 덕에 얼음 질감 사이로 느껴지는 오디의 씨앗과 과육 질감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알고 보니 전통적으로 시칠리아에서는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그라니따 형태로 많이 즐겨왔다고! 모든 곳에 있는 메뉴는 아니니 Granita di gelsi가 보인다면 기쁜 마음으로 시켜보길 바란다.
놀랍게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실망한(?) 메뉴는 커피였다
이탈리아 커피가 워낙 명성이 높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떤 수준 이상의 - 그러니까 궁극의 커피를 꿈꿨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 커피 문화가 워낙 발전해서인지 이탈리아에서 맛본 커피는 그저 '괜찮은 수준' 정도로 생각됐다.
산뜻하고 깔끔한 느낌의 '드립/스페셜티'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 커피 시장과 대조적으로 '크레마/에스프레소' 중심으로 완성된 이탈리아 커피 시장의 특성이 다른 것이 큰 이유였을까. 또 이미 한국에서도 수준 높은 에스프레소 바가 제법 많이 생겨서인지 이탈리아 카페 대부분이 기본 이상은 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어떤 수준 이상의 임계점을 돌파하는 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차원 높은 커피 메뉴를 꼽는다면 단연 '카푸치노'를 꼽고 싶다. 적당한 우유양과 거품 질의 수준이 보통의 한국 카페에서 만나는 라떼 같은 카푸치노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탈리아에서 아침을 맞을 땐 꼭 카푸치노와 시작해야만 한다.
여기까지가 겨우 2주 이탈리아를 경험한 내가 감히 추천해 보는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의 필수 메뉴들이다. 이탈리아 음식과 음료는 전반적으로 '원료의 풍미와 맛'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제법 자극적으로 변한 한국 음식과 동일한 궤로 비교하면 안 된다. '어떤 원료를 썼을까'하는 호기심으로 접근하면 그 풍미와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모두들 맛있게 이탈리아를 즐기길 바라며 -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