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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Sep 22. 2023

남들 생각도 해야지

다음 소희 (Next Sohee, 2023)

요즘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80년대에 학교를 다닐 때엔 그렇게 '단체기합'이 많았습니다. 말 그대로 한 사람이, 혹은 일부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징벌을 집단 구성원 전체가 다 떠맡는 거였어요. 방식은 뭐 너무 다양했죠. 운동장 뺑뺑이 같은 건 무척 양반이었어요.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고 손 들기, 의자 위에서 기마자세하기, 체육시간이나 교련시간에는 공포의 '머리 박고 한강철교' (어흑)... 간혹 힘이 남아도는 젊은 남자 교사들은 60명이 넘는 반 인원 전체를 빳따 때리기도 했었죠. 이런 단체기합 (이라고 불리는 가혹행위)을 받게 되면 처음엔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어요.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난 시키는 거 다 제대로 했는데, 하며 말이죠. 교사가 너무 원망스러웠죠. 그들은 그게 팀워크와 협동심을 고양하는데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지만요. 그리고 시간이 가면, 눈치 없이 실수를 저질러 이 단체기합을 유발한 원인제공자에게 화살이 돌아갑니다. 물론 그들이 싸움을 잘하거나 일진이면 너그럽게 용서하는 이중성도 발휘하지만, 대게 반 아이들 전체가 원인제공자를 따돌리는 원인이 되곤 했어요. 팀워크는 개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부당한 가혹행위들이었는데, 왜 저걸 순순히 따랐고, 또 그런 가혹행위에 대해 저항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연대책임을 떠맡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내 아이를 때려서라도 사람 만들어 달라, 어떻게든 대학만 보내달라고 부모들이 학교에 요청하던 시기였으니, 부모들도 자식이 그런 가혹행위를 당하는 걸 성장기의 통과의례 정도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걸 다 떠나서, 한 사람의 잘못에 대해 반 전체 모든 아이들이 강제적으로 징벌을 떠맡는 걸, 도대체 무슨 뻔뻔함으로 연대의식이니 협동심 같은 걸로 포장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사실 너무 뻔한 이유죠. 저런 단체기합을 주는 건. 집단 구성원들이 서로서로 감시감독하도록 만들기 위한 거예요. 정작 돈 받고 감독해야 하는 리더는 좀 더 꿀 빨면서 일할 수 있도록. 물론 호르몬이 미쳐 날뛰는 사춘기 괴물들 60여 명을 교사 혼자서 감당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겠죠. 총검을 들고 있는 40여 명의 병사를 소대장 혼자 관리하기 힘든 것만큼이나요. 하지만 일단 그런 조직의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하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구성원 통제, 관리의 용이성'을 위한 것을 왜 '팀워크 고양'이라는 명분으로 내세웠는지, 그리고 왜 그동안 한국인들은 그렇게 연대책임, 단체기합을 받는 것을 관대하게 받아들였는지에 관한 거니까요.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징용되었던 것을 포함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20세기에 두 차례 참혹한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번은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인한 내전이었다고 알려져 왔었죠 (강대국들의 대리전쟁이었다는 연구도 있지만, 역시 이것도 논외). 한국 전쟁의 비참했던 경험은 그 이후 오랫동안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변명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공포, 나와 닮은 이웃이 하루아침에 총부리를 나에게 향할 수도 있는 상황은 ‘우리 편’을 ‘나쁜 놈’으로부터 구별하고, 집단의 보호를 받기 위해 튀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겠죠. 여기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말했던 걸로 전해지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나, 여타 다른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옛 이야기들이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머릿속에 주지되어 왔었던 거죠. 그러니 북한이 금강산 댐으로 한반도를 물바다로 만들려고 한다는 뉴스를 의심하지 않고 코 묻은 돈을 성금으로 냈었던 것이고, 무분별한 기업대출로 IMF가 터졌을 때에도 장롱 속에서 금붙이를 꺼내와 나라를 살리려 했던 것 아니겠어요? 비록 높은 금융이자와 환율로 돈방석에 앉았던 사람들은 ‘이대로’, ‘영원히’를 외쳤었지만, 당장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해도 전 국민의 성금행렬에 동참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배신자로 취급받았을 테니까요. 가진 자들이 독점하는 초과이익에 대해서는 연대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문제가 터지고 난 후 책임을 지는 것만 연대를 빙자해서 집단 구성원 전체가 떠맡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음 소희 (Next Sohee, 2023)



제작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크랭크업필름

배급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각본 / 연출 : 정주리

주연 : 김시은, 배두나




영화는 2017년에 실제로 있었던 '전주 LG U+ 콜센터 현장 실습생 자살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이 자기 전공과는 다른 콜센터에 취업하게 되고, 그것도 보통 성인들도 버티기 힘들다는 '해지방어팀'에 배치되면서, 과도한 감정노동과 실적압박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고 결국 스스로 삶을 마쳤던 사건이 영화의 전반부를 구성하고, 이 사건을 추적하는 경찰의 활동이 후반부를 채웁니다. 배두나 배우가 담당형사로 나오면서 무엇이 소희를 죽게 만들었는지를 따라가는데, 남편(먼저 자살한 소희의 직장 상사)의 죽음을 왜곡하는 기업과 싸우지 않았던 유가족, 학생들의 현장실습 상황을 감독하지 않은 학교, 취업실적이라는 정량적 평가만으로 주어지는 보조금 혜택에 목 맨 직업계 고등학교 현실, 성과만을 강조하면서 비인간적인 서비스를 강요한 회사 등을 영상을 통해 차례차례 고발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의구심이 안 들 수는 없었어요. 왜 그녀가 죽어야 했는지 말이죠. 특히 장르적 장치를 통해 관객의 감정을 끌어당기는 신파적 구성이 아니라, 이렇게 건조하게 사실만 나열하는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기 어렵죠. 관객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시적 카타르시스가 아닌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다시 문제는,


과연 누가 그녀를 죽게 만들었나요?

아니, 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계속 그 일을 했던 걸까요?


기업이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비스 해지를 방어하는 것이 잘못인가요? 잘못은 아니죠. 하지만 고객이 분명하게 해지 의사를 밝혔는데도, 28번이나 전화를 돌리면서 해지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요. 그리고 거듭되는 해지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이유로 시간을 끄는 고객상당실에 울화통이 터지는 일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분노 표출 방향이나 방식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요. 근데, 예전에도 이런 일은 많지 않았나요? 80년대 동네 골목을 보면 집 대문 앞에 "00 일보 사절", "신문사절"이라고 종이로 붙여 놓은 장면이 빠지질 않죠. 당시 제 어머니의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가 신문 구독을 해지하는 일이었어요. 배달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요청해도 계속 집어넣고는 했으니까요. 그때부터 40년이 지났는데도 구독서비스를 끊는 일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증오심이 끓어오르게 합니다. 이런 기업의 과도한 방어에 대해 한국 소비자원이 중재를 하기도 하지만 (https://www.kca.go.kr/home/sub.do?menukey=4005&mode=view&no=1001164018) 소비자원에 이런 문의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형편이죠.  


그럼 이런 노동현장에 학생을 배치한 기업이 잘못인가요? 사람에 따라서 성격 차이가 있고 자기 적성이 있는데, 만일 해지 방어팀이 다른 콜센터 업무보다 급여조건이 좋다면 학생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것도 불평등하다는 기업의 논리를 부정하긴 힘들어요. 콜센터의 경우 실습생이 아니라 정식으로 취업한 사람들 역시 현장에서 교육을 받고 매뉴얼에 따라 업무를 봐야 하니까 어차피 다 같은 경력이라고 봐야죠. 물론 실제로 기업이 현장실습생을 한 해에도 94%가 퇴사하는 해지방어팀에 넣는 건 (그 당시에는) 근로기준법 적용도 안 받고, 어차피 오래 못 버텨도 새롭게 인력수급이 금방금방 되니까 그런 거겠지만요. 그래도 이런 극악한 노동환경은 고등학교를 졸업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문제가 되는 걸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정거래위와 소비자원, 그리고 해당 기업들이 모여서 사은품 제공 금지, 과도한 위약금 방지, 그리고 원클릭 구독 해지 서비스 같은 걸 만들지 않는다면 이토록 처참한 감정노동 현장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폭압적으로 실적만 강요되는 직장 분위기, 혹은 해지요청이 지연되었다는 이유로 흥분한 고객들의 언어폭력,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급여도 적게 받고 성과급도 못 받았다는 점, 사표를 쓰면 고스란히 학적부에 평생 낙인이 된다는 점, 이런 것들이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요? 술집에서 성인남성과 시비가 붙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갑질하는 고객들의 욕설이 지나치다 싶으면 맞받아치고, 직장상사의 빈정거림에 죽탱이로 응수하는 악바리인데도요? 노인 고객들 살살 구슬려서 해지방어에 성공하는 능글능글함도 나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도요? 소희 담임교사도 말하잖아요. "싫어하면 싫다고 하지, 그럴 애가 아니에요."


사람은 언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까요? 지독한 상실감이나 외로움. 이 세상 그 누구도 내 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 앞으로 남은 미래가 너무나 뻔하게 시시해 보일 때 그렇겠죠. 그리고 또 하나, 죄책감과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릴 때에도 그렇습니다.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한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날도 여느 날처럼 고객의 해지요청에 대해 위약금으로 인한 금전적 손해를 안내하고 있던 소희에게, 손님은 인터넷을 사용할 자신의 자식이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냥 해지해 달라고 부탁하죠.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들어오는 걷잡을 수 없는 참척의 슬픔에 공감하며 눈가에 눈물이 고이면서도, 소희는 반사적으로 위약금에 대해 안내를 하고 새로운 IP-TV 상품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팀장의 자살에 침묵서약을 하면서 회사가 던져놓은 봉투를 받았을 때도 그렇고요. 자신에게 무례한 사람들에게는 그 자리에서 반발을 하더라도 자신이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무심결에 척척 해내는 자신을 보고도 혐오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집단마취나, "튀지 말고 남들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로 대표되는 패거리 문화입니다.


악성 고객이 본사에 클레임을 걸어 방통위에 제소한다고 협박하자, 센터장은 고객에게 찾아가서 빌라고 하면서 서슴지 않고 ‘다’라는 단어를 쓰잖아요. “이거 못 막으면 (우리) 다 좆되는 거야.” 팀장의 자살에 대한 침묵각서를 끝까지 제출하지 않은 소희에게 새로 온 팀장이 소희를 다독이면서 말합니다. "소희 씨. 다른 직원들 생각도 해야지." 그리고 소희가 해지방어를 포기하니까 "너 때문에 우리 팀 실적이 떨어지고, 팀원 모두 인센티브가 떨어지고..!"라고 협박을 합니다. 한 개인이 신념을 지킨다는 것이 집단에게 피해가 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많은 경우, 공동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작은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그건 무척 가슴 아픈 일이고, 또 그만큼 그 사람의 양보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그렇지 않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개인의 생각을 다양성 관점에서 포용하기는커녕 그 개인을 단합을 깨뜨리는 이기주의자로 몰고 가는 경우는 너무 흔한 거죠. 유진의 수사에 따르면, (시간상 보면) 소희의 결심은 학교에 갔다 와서 바로 이루어진 걸로 보여요. 그리고 그때 학교에서 담임교사에게 들었던 얘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기도 엄연히 학교 생활의 연장이야. 이게 다 교과과정의 일부라고. 너 임마, 그렇게 해가지고 학교에 미치는 대미지가 얼마나 큰 지 알아, 엉? 거기서 이제 우리 학교 애들 안 받겠다고 그러면 어쩔 거야? 니가 후배들 앞길까지 막는 거야. 게다가 간신히 취업률 달성해 가는데 너 빵꾸나면 우리 반은 무슨 망신이니?"


수치심과 죄책감에 매몰된 채 어느 곳 하나 마음 쉴 곳을 못 찾던 소희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한국어에서 '민폐 (民弊)'는 일본어에서 '메이와쿠(迷惑)'와 사실상 쓰임새가 같습니다. 동아시아 국가들 전반적으로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보다 존중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맙시다'라는 정부 스폰서의 공익광고가 당당히 공중파에서 나놀 정도로 일본 문화에서 '민폐'를 터부시 하는 것은 공고합니다. 패전 후 미국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군사독재 없이 경제가 성장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가 아직 일본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은 특이한 일이지요. 심지어 '미야자키 고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는 스튜디오 지브리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희생해서 하고 싶지 않았던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을 정도니까요 (https://extmovie.com/movietalk/9182142). 여기서 "일제잔재"라는 만능키를 사용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연대 책임을 지거나 가족 전체가 야반도주를 하고, 누군가가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때 이웃들이 그 가족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일본 사회의 문제가 한국 땅에서 여전히 숨어있는 걸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조승희의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 이후 범인의 가족과 한국 정부가 사죄를 표명한 것도 그렇죠. 최근에는 교사에게 악성민원을 제기했던 어떤 이의 개인 범죄에 대해 그가 근무했던 회사에서 공식사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개인의 잘못에 대해 집단이 책임져야 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것이 당연해야 하는 건가요? 도대체 왜, 자기 하나 존엄성을 챙기며 살기도 빡빡한 사회초년생들이 다른 사람 입장까지 의무적으로 생각해줘야 하는 겁니까? 학생들의 현장실습에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도 문제고, 일하던 사람들이 업무상 스트레스로 자살했는데도 사업주가 수사를 받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지만, 소희 개인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우고 양보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각서에 싸인을 안 하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려 하는 소희의 신념을 존중해 줬다면, 그녀가 그렇게 조용히 떠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이후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권 내에 진입하려는 나라에서 아직도 개인주의자가 사이코패스와 동일시되는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개인의 희생과 양보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은 집단이 "연대"라는 단어를 쓸 때만큼 역겨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한국 군대문화의 부조리를 단적으로 보여줬던 두 참극, "참으면 윤일병, 못 참으면 임병장"이라는 말이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억측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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