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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Jan 09. 2024

너의 괴물은

이민기 속집 외전 - 빅토리아 다운타운 여행 #3

때는 바야흐로 1991년 1월, 대학 영화 써클 생활 1년이 지나고,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조금은 솔직해질 수 있을 무렵, 부산에 살던 써클 선배의 집에 놀러 갔다가 스케줄이 엉켜서 시간 때우기로 우연히 들어갔던 극장에서 처음 단 5분으로 내 두 눈을 스크린에서 떼어놓지 못했던 영화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폭풍소년>!!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아키라>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렇게 잘 만들었다는 얘기는 풍문으로 듣고는 있었지만, 홍콩제작 만화영화로 둔갑해 불법수입되어서 (당시 한국에선 일본 영화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단 일주일간 극장에 걸렸던 것을 이렇게 우연히 보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 영화 한 편 때문에 그전 10년간 만화 따위는 거들떠도 안 봤던 내가, 이후 10년간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게 될 줄이야...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비포선라이즈> 시리즈에서도 잘 그려지듯이 우리는 '우연한 만남'을 신성시하고, 때로는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행에서 겪게 되는 만남의 감동은 사람들에게서도, 음식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이렇게 창작물을 통해, 그것도 우연하게 만나는 경험은 좀처럼 쉽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후폭풍이 컸던 걸지도.


빅토리아 휴가 첫날,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의사당과 항구 주변으로 연결된 산책로를 돌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Vic Theatre>라는 간판을 붙인, 80년대 한국 동시상영관 규모의 작은 극장이 하나 보였다. 연말에 컬트영화 특집이라고 <로보캅>과 <칠드런 오브 맨>을 상영한단다. 그리고 25일 크리스마스 날에는 가족영화 특집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을  (https://www.victoriafilmfestival.com/theatre/). 아니, 희망찬 새해 시작을 앞두고 디스토피아 미래의 끝을 보여주는 <로보캅>과 <칠드런 오브 맨>을 상영하다니, 그래놓고는 크리스마스 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뭔가 조합이 이상한 것 같지만, 이런 작은 극장에서는 극장주 마음대로 상영 프로그램이 종종 결정되기도 하는 법이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러 올까 하는 아내의 제안을, 필름이라면 모를까 소극장에서 디지털 상영하는 걸 굳이 돈 내고 볼 생각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더랬다. 집에 블루레이 디스크도 있는데 말이지. 그래도 혹시 필름일지 모르니, 숙소에 도착해서 그 소극장 웹사이트에 가봤더니...


내일모레 상영작이 무려 고레에다 히로카츠의 <괴물>.


우왘


캐나다 대형 극장 체인인 Cineplex에서 12월 1일 개봉은 되었지만, 토론토에 있는 예술극장 한 군데에서만 상영했을 뿐 밴쿠버에는 오질 않았었다. 뭐, 자주 있었던 일이긴 했지만 모든 사람이 열광했던 이 문제작을 결국 또 스트리밍으로 봐야 하는 건가... 하며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걸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33년 전 <아키라>를 우연히 봤을 때처럼, 영화사에 남을 걸작을 또 이렇게 여행 중 우연히 만나게 되는구나. 얼른 인터넷으로 예매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다른 모든 캐나다의 관람 예약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예약에는 수수료가 붙는다고 한다. 뭐, 설마, 크리스마스 다음 날 빅토리아 다운타운에서, 일본영화를 좌석이 없어서 못 보는 경우는 없겠지 생각 들어 당일 현매를 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 영화 감상이 이번 연말 휴가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캐나다에는 크리스마스-연말 시즌에 있는 독특한 전통으로, 바로 '박싱데이 Boxing Day' 12월 26일이 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어 보는(unboxing) 것처럼 각종 소매업에서 크리스마스 쇼핑용으로 비축해 둔 재고를 다음날 헐값에 팔아버리는 전통이었는데, 지금에 와선 창고의 부동산 임대료보다 유통비용이 훨씬 저렴해진 관계로, 원래 전통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그냥 사람들이 기다리는 연례 할인 행사날정도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다. 내가 소매업계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일 년 중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였고, 새벽 6시에 오픈을 하기 위해 4시부터 출근해서 준비를 하기도 했었다. 'Door Crasher'라고 부르는 한정 할인상품을 오픈런으로 사기 위해 손님들도 새벽에 미리 와서 문 앞에서 줄을 서기도 했었다. 이후에는, 소매업체가 아닌 제조사들이 직접 박싱데이 - 박싱위크용 특별 할인 상품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해서 소매업체들 간에 같은 상품을 비슷한 할인 폭으로 판매하기도 하고, 또 '베스트바이'나 '코스트코'처럼 거대 소매업계에서는 자기들에게만 맞는 특별한 상품을 독점적으로 공급받아 팔기도 했다. 박싱데이의 특별 할인 가격 결정은 더 이상 소매점포만의 주관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캐나다 달러가 미달러에 잠시 역전하는 바람에 많은 캐나다 소비자들을 아마존이나 뉴에그와 같은 미국 온라인 소매업계에 뺏긴 이후부터는, 미국에서 건너온 '블랙 프라이데이 Black Friday'에 밀려, 박싱데이는 이제 그냥 연말에 한번 더 손님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유인수단 이상은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박싱데이라서 그런지 어제와는 달리 다운타운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제는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비록 정식 국정공휴일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박싱데이에 휴무를 하는데, 이곳 다운타운 상점가 거리는 사람들이 가득가득 차 있고 몇몇 유명 브랜드 상점 앞에서는 길게 줄이 늘어져 있기도 하다. 코로나 시기를 겪은 이후부터는, 저렇게 상점들에 사람이 몰리고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만 봐도 살짝 감동이 들기도 한다. 거리가 살아있는 것 같다. 빅토리아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건물들도 사람들의 행렬 앞에서 더 예술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부동산 광고 위 낙서도 좋아 보인다. 공인중개사들이 자신의 얼굴을 크게 드러내놓은 광고 위에 사람들이 종종 낙서를 해놓는데, 밴쿠버에서는 주로 눈알을 파놓지만 빅토리아에선 살바도르 달리 풍의 멋진 수염을 그려놓았다.


다운타운과 차이나타운 경계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 <Il Terrazzo https://www.ilterrazzo.com>는 신선한 재료와 창의적인 요리방식으로 많은 곳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식당인데, 그나마 있는 나쁜 리뷰들은 대개 예약이 너무 어렵다는 불만이었다. 이미 크리스마스 날 다른 식당 예약에 오류가 생겨 뺀치를 먹은 경험이 있어, 과연 박싱데이에 이 식당이 열 것인가 조마조마했었지만, 여는 것뿐만 아니라 4시 오픈에서 5분 정도가 지나자 이미 홀이 가득 찼다. 식전빵으로 포카치아를 길게 썰어 내왔는데, 올리브와 페퍼를 잘게 썰어 만든 딥핑 소스가 무척 중독성 있었다. 이러다간 빵으로 배를 다 채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로. 이후에 나온 해산물 파스타 역시 각종 해산물과 국수의 익힘 정도가 무척 절묘해서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재료의 육즙과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오래된 벽돌집처럼 꾸민 Il Terrazzo의 내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 쪽으로 돌아오니 영화 상영시간까지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일단 그럼 숙소에서 쉬었다 나오기 전에 현장예매를 하자 싶었는데, 어느 영감님이 "응? 너희 너무 일찍 온 것 같은데??" 하며 놀란다. 그게 아니라 예매를 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니 "그 한국 영화를 예매하려고 이렇게 일찍 왔다고?" 하며 또 한 번 놀란다. 아... 그렇지...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깐느에서 각본상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게 모든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겠지. 그냥 변방의 이름 없는 감독이 만든 예술영화면 한국 영화가 되었든 일본 영화가 되었든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되어 있다.


영화는...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 고레에다 히로카츠 영화치곤 감정의 울림이 격하게 요동치는 연출이 좀 낯설기도 했지만, 어른들의 관심 사각에 놓여진 아이들, 그리고 대안 가족 모델 등의 소재는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로 하여금 괴물의 정체에 대해 시종일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선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과 그냥 들은 소문만으로 상대를 재단 (裁斷 judging) 하는 것에 스스럼없다. 사오리는 아들의 말만 듣고 미나토가 호리 선생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믿기도 하고, 소문을 통해 호리가 성매수를 하는,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선생이라 단정한다. 호리는 사오리가 싱글맘 특유의 과잉보호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교장이 스스로 운전해서 손녀에게 사고를 낸 것을 남편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공격하기도 한다. 심지어 미나토 역시 요리가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는 걸 보고 요리가 방화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련의 억측과 의심들은 우리 삶에서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난다.


우리는 누군가와 의견이 부딪힐 때 상대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정의와 공평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단지 자신의 도덕성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즐기기 위해서 무심코, 혹은 계획적으로 타인의 품행을 지적한다. 공격에 사용되는 무기가 거짓소문이든, 혹은 나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실이 되었든 상관없다. 기초수급가정이 편의점 폐기음식을 먹는 대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당장 부정수급자라고 신고를 하기도 한다. 연예인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해도, 그 사람의 품행에 대한 성토를 넘어 모든 출연작과 광고상품을 보이콧하기도 한다. 규칙과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규칙이 진정 그렇게 완벽한 것인가? 그들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린 미나토가 요리와의 감정교류에 대해 어른들에게 숨기려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약간의 빌미만 보이더라도 어떤 식으로 판단받게 될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타인의 인생에 대해 가타부타 평가할 자격을 주었던가? 우리 속의 괴물은 바로 타인에 대한 수많은 편견, 재단질과 평가질 아닌가? 경희대 김진해 교수의 책 <말끝이 당신이다>의 표지 디자인은, 제목을 이루는 문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화살촉을 만드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많은 화살촉을 타인의 가슴에 박으면서 사는 것일까? 이런 사회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전 작품들에서는 조근조근 얘기하던 고레에다 감독이 이렇게 비명을 지르게 되었을까?


이런 얘기를 아내와 나누면서 숙소로 돌아와서는,

내가 좋아하던 배우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난 당신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당신이 저지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는데,

내 글이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이유 없이 계속 눈물이 흘렀다. 아내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계속 슬픈 영화를 골라 보긴 했지만 예능방송을 보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마어마한 슬픔과 무기력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 책임을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속 시원하게 돌릴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마음속 무거움이 자리잡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또 타인에 대한 평가질의 악순환만 생겼겠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격려의 글 하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할 능력은 과연 있을까?






매해 연말 방송사 시상식 프로그램을 보는 건, 왠지 그 특유의 잔칫집 분위기를 같이 즐기기 위해서다. 보통은 연말 음식 (만두)을 만들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보게 되는데, 이번 MBC 방송 연예대상은 (연예인 백그라운드가 없는) 기안84가 유재석과 전현무를 제치고 대상을 탈 것인가가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다가 공로상이 이영자 개그맨에게 돌아가는 장면을 보고 그만 또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사람들의 말끝 때문에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해왔었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건재하게 공로상을 타는 모습이 너무나 감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 방송에서 이영자 개그맨과 동료 방송인들이 "뷔페에서 보이는 꼴불견 Best"라는 얘기를 했던 장면이 기억났다. '자신은 안 움직이고 남이 가져온 음식 먹는 사람',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남에게 먹이는 사람', '두 접시만 먹는 사람' 등등이 꼽혔는데, 이영자 개그맨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뷔페 갔을 때..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난 나한테 집중되어 있고, 음식하고 대화하고......"



자기 음식이 아니라 타인의 품행에 더 많이 신경 쓰는 말끝들 때문에 고초를 겪었던 이영자 씨,


버텨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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