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짧고 지구는 길다
햇볕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6월부터였다. 어린이집 엄마들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건.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를 등원시키고 있으면, 이제 시작인데 한여름엔 어떡하냐고 차에서 금방 내려 뽀송뽀송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나는 13년 장롱면허를 보유한 뚜벅이 엄마다.
어린이집은 그리 멀지 않다. 걸어서 15분 거리다. 그런데 15분이란 게 참 애매하다. 혼자라면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챙겨야 하는 아이가 있을 경우엔 말이 달라진다. 오죽하면 영유아를 기관에 보내는 엄마들 사이에 명언처럼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겠는가. "어린이집은 무조건 가까운 게 최고다."
엄마들이 걱정할 때마다 "그러게요. 차라리 비나 시원하게 쏟아지면 좋겠어요." 했는데... 아뿔싸 이렇게 기록적인 폭우를 말한 건 아니었는데.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만 레인커버를 씌운 유아차를 밀며 낑낑대다가 결국 남편에게 SOS를 쳤다. 그렇게 한동안은 아이와 함께 출근하는 남편 차를 얻어 타고 등원할 수밖에 없었다.
몇 주간 계속되던 호우경보가 끝나자, 이번엔 폭염경보다. 연일 35도를 웃도는 날씨를 뚫고 아이를 등원시키며 생각했다. 이제 진짜 운전을 해야한다고 말이다. 사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운전연수를 받으라고 닦달(?) 해왔다. 주변에서도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면 생활 반경이 달라진다며 적극 추천했다. 그런데도 나는 차일피일 운전하기를 미뤘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겁이 많아서다. 자동차가 역주행하는 동영상을 보면 미래의 내 모습인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운동신경이 둔한 것도 아닌데(두 발 자전거 숙련자에 한때는 수영 꿈나무) 운전은 왜 이리 겁이 나는지.
둘째는 지구에게 미안해서다. 에어컨을 켜는 일이 연례행사인 부모님과 통화할 때면 이 더위에 쪄 죽겠다고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나 역시 혼자 있을 땐 선풍기와 한 몸이 된다.
영유아가 있는 집에서 에어컨을 아예 안 켜고 살 수 없고, 자가용 없이 다닐 수는 없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 하는 편을 택하려 한다. 이렇게나마 지구에게 빚진 마음을 덜어내고 싶다.
같이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이런 나에게 여름철 동네 도서관은 좋은 피서지다. 카페보다 사람이 덜 북적이고, 무엇보다 집에서 가깝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맘 편히 읽을 수도 있다. 며칠 전에도 도서관에서 흥미로운 그림책을 발견했다. 커다란 타이포그래피 제목의 감각적인 표지가 멋진 그림책 <우리 같이>다
긴 글줄 없이 짧은 대화체로 이루어진 그림책은 같이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첫 장이 아닌 면지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딘가에서 쫓겨난 펭귄 한 마리가 작은 조각얼음에 의지해 위태롭게 바다에 떠 있다. 그러다가 펭귄 무리가 탄 제법 큰 얼음배를 발견하고 몰래 숨어든다. 펭귄들은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를 쫓아내려 애를 쓰고 결국엔 무리와는 달리 발 색깔이 짝짝이인 펭귄을 찾아낸다.
낯선 펭귄을 골라내자 곧바로 북극곰이 나도 태워달라고 나타난다. 펭귄들은 이번에도 곰이 자신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찾아내며 밀어낸다. 그러던 찰나, 상어가 입을 벌리고 나타나 이들을 위협한다. 궁지에 몰린 펭귄들과 곰은 물고기를 상어에게 내어주고 함께 힘을 합쳐 위험에서 벗어난다.
요즘처럼 편 가르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아니 다르면 좀 어떠냐고, 그래도 같이 살자고 손 내미는 책이다. 더 큰 위험이 닥쳐올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고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이 작고 여러 위험 가득한 지구라는 별에서 타인이 우리가 되는 것만큼 경이롭고 신나는 경험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과 같이 어울려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그림책의 글이 짧다고 내용이 풍성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어떤 그림책은 글보다 그림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이 그림책도 그렇다.
짝짝이발 펭귄을 침입자로 명명하고 따돌림을 주도하는 이는 바로 대장 펭귄이다. 무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어 가장 먼저 낯선 이들을 발견하지만 좋은 우두머리 같지는 않다.
말로 명령할 줄만 알지 위기가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는 능력은 빵점이다. 상어에게 물고기를 모두 주고 배고픈 펭귄들이 열심히 물고기를 잡을 때, 얼음 배 위에서 혼자 물고기를 우적우적 먹는 것도 대장뿐이다. 대장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반면, 침입자로 지목된 짝짝이발 펭귄의 행동은 사뭇 다르다. 그는 상어를 물리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가장 먼저 바다에 뛰어든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을 때, 얼음 배 가장 뒤에 앉아 노를 저으며 묵묵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짝짝이발 펭귄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먼저 손을 내밀어준 몇몇 펭귄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장 펭귄이 '침입자'라 했음에도 이름을 물어봐주고, 인사를 하며 먼저 다가가는 펭귄들.
그중에서도 꼬마 펭귄 하나가 눈에 띄는데 짝짝이발 펭귄이 배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손을 내밀어 구해주는 이가 바로 이 꼬마 펭귄이다. 그 이후로 짝짝이발 펭귄은 날아가는 꼬마 펭귄을 잡아주고,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주면서 계속 꼬마 펭귄을 도와준다.
인간이 다투는 동안 망가지는 지구
한 권의 그림책은 여러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는데, 이 그림책 역시 마찬가지다. 차별이나 배제, 공동체 같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주제는 물론, 기후변화나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
내가 이 그림책을 고른 건 바로 첫 장면 때문이었다. 얼음 조각에 타고 있는 짝짝이발 펭귄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얼음 조각은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 것처럼 작았다. 북극곰이 서 있는 얼음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펭귄에게도 북극곰에게도 작은 얼음덩어리 밖에 내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남극에 사는 펭귄과 북극에 사는 북극곰이 만난다는 설정도 예사롭지 않다. 남극에서 사는 펭귄들이 북극까지 얼음 배를 타고 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펭귄이 탄 작은 얼음 조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지구와 지구에 사는 동물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인간들이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울 때 지구는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독일에 사는 건축학자 엄혜지는 자동차 없이 자전거로만 생활한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해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고등어 먹기를 포기했다. 그녀는 <고등어를 금하노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는 자동차를 보면 그 사람의 계급과 재력뿐 아니라 교양과 성품까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장담할 정도로 자동차가 주인을 상징하곤 한다. 그런 사회에서 자가용 없이 산다는 것은 남이 모르는 특별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뜻한다. 남과 비교될 일도 없고, 자동차를 사거나 유지하느라 돈 쓰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 정신적, 물질적으로 상당히 자유롭다. 또한 지구 환경을 위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에 옮기니 양심도 가볍고, 당당한 주인 의식도 생긴다.
그녀처럼 뚜렷한 삶의 방향성을 가지고 실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고등어를 먹는 것처럼 기존에 누리던 일을 포기하는 일은 더더욱이나 그렇다. 그에 비하면 내가 운전을 하지 않는 일은 쉽다. 원래부터 하지 않던 것이니, 약간의 불편함을 참으면 되는 것이다.
그림책의 얼음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 여름은 지금처럼 차 없이 살아야겠다고. 땀 좀 흘리면 어떻고, 비 좀 맞으면 어떠랴. 집에 와서 씻으면 되는 건데. 여름은 짧고 지구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