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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법 시대의 비밀: 절망 속에서 피어난 지하 와이너리

by 박정수

본 글은 GEMINI, GROK, Google Nano Banana, Bing, COPILOT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세기 초 음주로 인한 폭력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유럽과 미국을 불문하고 금욕적인 청교도 교리의 영향이 강한 곳에서는 음주에 대한 강한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남북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전쟁의 피해로 인해 사회적인 좌절감이나 불안과 같은 심리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개인의 음주량도 함께 증가했다. 특히 주된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된 것은 바로 남편이 음주 후 아내와 아이들을 향해 휘두르는 가정폭력이었다. 이에 따라 농촌의 개신교 세력(금주 십자군 등)과 기독교 계열 여성단체(여성기독교금주연맹 등)가 뭉쳐 금주법 제정을 주도했다. 1919년 여성의 참정권 보장이 진행된 이후 금주법은 빠른 속도로 정치권에서 비준됐다." 이 글의 배경 설명을 위해 아래 링크에서 인용된 글입니다.


https://scc.sogang.ac.kr/front/cmsboardview.do?currentPage=1&searchField=ALL&searchValue=&searchLowItem=ALL&bbsConfigFK=3630&siteId=sgunews&pkid=901809





우리는 지금까지 와인의 맛을 완성하는 테루아, 효모, 오크통, 그리고 와인잔에 담긴 과학까지, 와인의 빛나는 순간을 도운 공로자들을 만나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만날 공로자들은 빛이 아닌, 역사상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와인의 명맥을 지켜낸 이들입니다.


때는 1920년 1월 17일, 미국 전역에 '볼스테드 법(Volstead Act)', 즉 금주법이 발효됩니다. 주류의 제조, 판매, 운송이 전면 금지되면서, 수천 개의 와이너리가 문을 닫았고 포도밭은 불태워지거나 버려졌습니다. 미국 와인 산업은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와인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하로 숨어들었을 뿐입니다. 이 암흑기에 와인을 지켜낸 숨은 공로자들은 바로 법의 허점을 파고든 교묘한 사업가들, 신념을 굽히지 않은 와인메이커, 그리고 전통을 포기하지 않은 평범한 '가정의 가장'들이었습니다.


1. 법의 허점: 200갤런의 '과일 주스'

금주법은 모든 것을 금지하는 듯 보였지만, 교묘한 탈출구를 남겨두었습니다. 법안 제29조에는 "가정의 가장은 비(非) 중독성 사이다와 과일 주스를 개인적 용도로 연간 최대 200갤런(약 757리터, 1,000병 분량)까지 생산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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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일 주스'라는 단어가 미국 와인 산업의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포도 농가들은 와인을 병에 담아 파는 대신, 포도를 압착한 '농축액'이나 '포도 벽돌(Grape Bricks)' 형태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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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포도 벽돌'은 금주법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자 노골적인 농담이었습니다. 단단한 포도 농축액 덩어리에는 이런 경고문이 붙어있었습니다.


"경고: 이 벽돌을 1갤런의 물에 녹인 뒤, 설탕과 이스트를 넣고 어두운 곳에 21일간 보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와인'이라는 불법적인 중독성 음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고문이 아니라, 완벽한 '와인 제조 매뉴얼'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 친절한(?) 경고를 따라 지하실과 부엌에서 와인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How Wine Bricks Saved The U.S. Wine Industry During Prohibition | VinePair

번역본은 다음과 같아요.

와인 브릭이 금주법 기간 동안 미국 와인 산업을 구한 방법 | 바인페어


2. 허점 덕에 탄생한 외인 Rovert Mondavi

이 와인 벽돌의 결과는 유명한 Beringer Vineyards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도와 이러한 농축액 제품에 대한 수요는 금주법이 내려졌을 때 감소하지 않고 증가했지만 여러 와인메이커가 이미 과수원을 심기 위해 포도원을 허물었기 때문에 공급을 따라잡을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1924년까지 톤당 가격은 충격적인 375달러로 금주법 이전의 가격표인 9.50달러에서 가격이 3,847% 상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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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오르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포도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나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한 사람 중 한 명은 미네소타 출신의 식료품 상인인 체사레 몬다비(Cesare Mondavi)로, 그는 부를 벌 수 있는 것을 보고 온 가족을 캘리포니아로 이주시켜 참여했습니다. 금주법으로 인해 몬다비 와인 왕조가 탄생했습니다. 금주법 덕분에 만들어진 이 왕조와 다른 왕조는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업이 미국의 가뭄 기간 동안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보장했습니다.


How Wine Bricks Saved The U.S. Wine Industry During Prohibition | VinePair


BCO.506187c5-4431-4a8b-9b86-09e27a1f3b9b.png?w=384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COPILOT에게 그려 달라고 했어요

참고로 로버트 몬다비는 한국에도 수입이 되는 미국최대의 와이너리입니다.

1966년 나파밸리에 설립된 최초의 프리미엄 와이너리로, 미국 와인 산업의 현대화를 이끈 선구자입니다.

저온 숙성, 스테인리스 탱크, 프랑스산 오크통 도입 등 기술 혁신을 통해 품질 중심의 와인 생산을 정착시켰습니다.

와인 관광(Wine Tourism)을 최초로 도입해, 와이너리를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백악관 공식 만찬 와인으로도 여러 차례 선정되었으며, 미국 대통령들과의 인연도 깊습니다.



3. 지하의 양조 가들: 전통을 지킨 이민자들

이 '가정용 와인' 제조의 중심에는 식사에 와인이 빠질 수 없었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식사의 일부이자 문화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뉴욕, 시카고 등 대도시의 아파트 지하실이나 창고에 숨어들어, 캘리포니아에서 기차로 실어 온 '과일 주스용' 포도로 와인을 빚었습니다.

덕분에 와인 산업은 기이한 형태로 재편되었습니다. 상업적 와이너리는 몰락했지만, '가정용' 포도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19년에서 1925년 사이, 캘리포니아에서 동부 도시로 운송된 포도 물량은 4배 가까이 급증했습니다. 와인 양조는 거대 산업에서 수백만 개의 작은 지하 세포조직으로 분화하여 생존한 것입니다.



4. 역설의 공로자: '알리칸테 부쉐(Alicante Bouschet)'

금주법 시대는 와인의 품질에 있어서는 재앙이었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피노 누아처럼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품종들은 동부까지의 험난한 기차 운송을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포도밭 소유주들은 이 고급 품종들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영웅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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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은 '알리칸테 부쉐(Alicante Bouschet)'.

이 포도는 고급 와인용으로는 끔찍했지만, 금주법 시대에는 완벽한 품종이었습니다.

두꺼운 껍질: 장거리 운송 중에도 썩거나 터지지 않았습니다.

검붉은 과육: 껍질뿐 아니라 과육(果肉)까지 붉은 '탕튀리에(Teinturier)' 품종이라, 물과 설탕을 섞어 양을 몇 배로 늘려도 여전히 진한 붉은색 와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알리칸테 부쉐'는 미국 와인의 품질을 수십 년간 후퇴시켰지만, 동시에 포도밭 자체를 유지시키고 수많은 농부와 지하 양조가들의 생계를 책임진 '역설의 공로자'였습니다.


5. 또 다른 탈출구: 성찬용 와인과 약용 와인

두 가지 합법적인 예외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성찬용 와인(Sacramental Wine)'과 '약용 와인(Medicinal Wine)'이었습니다.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와인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전국의 '성직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와인을 공급받으려는 교회와 유대교 회당이 급증했습니다.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볼리외 빈야드(Beaulieu Vineyard)' 같은 일부 와이너리들은 가톨릭교회에 성찬용 와인을 납품하는 독점 계약을 따내며 금주법 시대에도 합법적으로 와인을 생산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의사들은 환자에게 '건강을 위한' 와인을 처방할 수 있었습니다. 약국에서는 '포트 와인'이나 '셰리 와인'이 강장제처럼 팔려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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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어둠 속에서 지켜낸 한 잔의 유산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었을 때, 미국 와인 산업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급 와인을 만들던 기술은 단절되었고, 포도밭은 저급 품종으로 뒤덮였습니다. 미국 와인이 '파리의 심판(1976년)'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되찾기까지는 그로부터 40년이 넘는 재활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3년간의 암흑기 동안 누군가는 와인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주법 시대의 진정한 '숨은 공로자'는 거대한 와이너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하실에서 '포도 벽돌'을 물에 풀던 평범한 가장이었고, 품질 대신 생존력을 택한 알리칸테 부쉐 포도였으며,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성찬용 와인을 지켜낸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절망의 시대에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즐거움과 문화적 전통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 지하의 양조가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캘리포니아 와인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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