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아 가도(Appian Way)부터 브리타니아(Britannia영국)
이 글은 gemini, grok, copilot, wiki의 도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플리니우스 엘더의 《자연사》와 로마 와인 역사 연구(예: Hugh Johnson의 'The Story of Wine')를 기반으로 하며, 효모와 오크통 그리고 테루아의 역할은 기존에 브런치에 연재한 글들 및 과학적 증거를 반영했습니다.
기원전 2세기, 로마 제국의 군단이 유럽의 대지를 밟을 때마다, 그들의 수레에는 단순한 무기와 곡물만 실리지 않았다. 포도 덩굴의 씨앗과 양조 기술이 함께 실려, 제국의 길 위에 뿌려졌다. 로마 제국은 와인을 단순한 음료가 아닌 제국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아피아 가도(Appian Way)부터 지금인 영국인 브리타니아의 먼 국경까지, 8만 킬로미터가 넘는 도로망이 와인의 확산을 가능케 했다.
참고로 가도(街道)는 ‘거리(街)’와 ‘길(道)’을 합친 말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큰길, 주요 교통로를 의미한다.
이 '길 위의 씨앗'은 오늘날 유럽 와인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확산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공헌자들이 있었다. 효모의 미세한 발효 마법, 오크통의 견고한 보호, 그리고 포도밭의 숨겨진 과학이 로마의 와인을 제국의 혈관처럼 퍼뜨린 것이다.
아피아 가도(Via Appia, )는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도로(세계최초의 포장도로)로, 로마와 풀리아주의 브린디시를 연결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감찰관이 기원전 31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주와 이태리는 정말 조상의 덕을 많이 본 나라이다. 호주는 넓은 땅을 받았고, 이태리는 아피아가도를 포함한 많은 유물과 역사기록을 받았다.
https://www.getnomad.app/ko/destination-guides/the-appian-way-rome
https://www.youtube.com/watch?v=F-YFnU3Keog
기원전 312년, 로마는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건설하였다. 이는 로마에서 남부 브린디시까지 이어지는 제국 최초의 본격적인 간선도로였다. 군단의 발걸음과 상인의 수레가 오갔던 이 길은 단순한 돌길이 아니라, 제국의 생명줄이었다. 와인 암포라가 실린 수레가 이 길을 따라 움직일 때, 아피아 가도는 곧 와인의 동맥이 되어 로마의 문화를 유럽 전역으로 퍼뜨렸다.
아피아 가도의 끝에는 브린디시 항구가 있었다. 이곳은 로마 제국의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 와인이 지중해를 건너는 출발점이었다. 브린디시에서 출발한 와인은 그리스와 에게해를 지나,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이 항구는 곧 씨앗이 바다로 흘러나간 관문이 되어, 로마의 와인 문화가 새로운 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했다.
로마 군단이 진군할 때마다 포도 덩굴은 함께 옮겨졌다. 갈리아의 보르도와 부르고뉴, 히스파니아의 리오하와 안달루시아는 로마가 심은 포도 씨앗을 받아들였다. 현지의 토양과 기후, 그리고 고유한 효모가 결합하면서 새로운 와인 풍토가 형성되었다. 이 지역들은 곧 와인의 새로운 토양이 되어, 로마의 씨앗을 자신들만의 풍미로 재탄생시켰다.
모젤 강 유역의 리슬링, 브리타니아의 켈트족에게 전해진 와인 문화는 로마의 길을 따라 퍼져나갔다. 오크통은 먼 여정에서도 와인을 보호하며, 제국의 길을 따라 북쪽 국경까지 와인을 실어 나르는 침묵의 수호자였다. 결국 로마의 길은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문화와 기술, 그리고 와인의 씨앗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로마 제국은 무너졌지만, 그 길 위에 뿌려진 와인의 씨앗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키안티, 프랑스의 보르도, 스페인의 리오하, 독일의 리슬링, 영국의 와인 문화까지 모두 로마의 길에서 비롯된 후예들이다. 아피아 가도는 단순한 돌길이 아니라, 와인의 동맥이자 문화의 길이었다. 그 길은 지금도 포도밭으로 이어지며, 한 잔의 와인 속에 로마의 유산을 담고 있다.
로마 제국의 와인 역사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중부의 화산 토양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와인을 '신들의 넥타르'로 여겼고, 군단원들에게 매일 한 잔의 와인을 배급했다. 이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었다. 와인은 영양 공급원이었고, 물의 오염을 막는 소독제였다.
제국이 확장되면서 포도 덩굴은 로마의 길을 따라갔다. 갈리아(프랑스), 히스파니아(스페인), 게르마니아(독일)로 군단이 진군할 때, 그들은 포도 품종을 이식했다. 보르도 지역의 카베르네 소비뇽,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 이들은 로마의 '씨앗'에서 유래했다. 도로는 이 확산의 동맥이었다. 로마 엔지니어들이 만든 포장도로는 비와 진흙에도 견디며, 와인 암포라(항아리)를 안전하게 운송했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와인이 살아남은 것은 보이지 않는 공헌자들 덕분이었다.
효모, 이 작은 미생물이야말로 로마 와인의 보이지 않는 영웅이었다. 포도 주스의 당분을 알코올로 바꾸는 발효 과정은 효모의 작품이다. 로마인들은 이를 '신의 선물'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야생 효모가 포도 껍질에 붙어 자연적으로 일어났다. 플리니우스 엘더의 《자연사》에서 그는 "와인은 스스로 발효한다"라고 썼지만, 이는 효모의 역할을 몰랐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길을 통해 포도를 퍼뜨릴 때, 효모도 함께 여행했다. 갈리아의 추운 기후에서 효모는 적응하며 새로운 맛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모젤 강 유역의 리슬링 포도는 로마 군단이 심었고, 현지 효모가 산미를 더해 독일 와인의 기반을 닦았다. 효모는 변덕스러운 존재다. 잘못된 균주가 침투하면 초산 발효로 식초가 되지만, 로마인들은 경험적으로 이를 제어했다. 그들은 포도를 으깨는 '페달링' 기법으로 효모를 활성화시켰고, 이 기술이 길 위에 뿌려지며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오늘날 와인메이커들이 사용하는 선택적 효모 균주는 로마의 유산이다. 효모 한 알갱이가 제국의 길을 따라 와인 문화를 '발효'시킨 셈이다.
오크통 역시 로마의 길 위에서 빛난 보이지 않는 공헌자였다. 초기 로마 와인은 테라코타 암포라에 저장되었지만, 제국 확장으로 오크통이 등장했다. 갈리아의 오크 숲에서 채취한 나무는 와인을 운송하고 숙성시키는 이상적인 용기였다. 오크의 미세 기공이 산소를 서서히 통과시켜 산화를 방지하고, 바닐라와 스파이스 향을 더했다. 로마 상인들은 오크통을 수레에 싣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부 국경까지 와인을 실어 날랐다. 이 통들은 제국의 길이 거칠어도 와인을 보호했다. 예를 들어, 브리타니아(영국)로 가는 긴 여정에서 오크통은 와인을 신선하게 유지하며, 현지 켈트족에게 와인 문화를 전파했다. 오크통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와인의 '침묵의 수호자'로, 타닌을 부드럽게 하고 복잡성을 더한다. 로마인들은 오크통을 불에 구워 내구성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는데, 이는 오늘날 프랑스 오크 배럴의 원형이다. 길 위에 뿌려진 이 기술은 유럽 와인 산업의 토대가 되었다. 만약 오크통이 없었다면, 로마의 와인은 먼 여정에서 상했을 것이다.
로마 제국의 길은 와인의 씨앗을 뿌리는 동시에 문화 교류의 촉매였다. 포도 덩굴이 심어진 지역마다 현지 토양과 기후가 새로운 테루아를 만들었다. 효모와 오크통의 조합으로 리오하(스페인)의 템프라니요, 론 밸리의 시라가 탄생했다. 제국 쇠퇴 후에도 이 씨앗은 살아남아 중세 수도원에서 꽃피었다. 그러나 이 확산은 대가도 따랐다. 로마의 과도한 포도 재배는 토양 고갈을 초래했고, 효모 오염으로 질 낮은 와인이 양산되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공헌자들은 와인을 '제국의 유산'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글로벌 와인 시장에서 로마의 흔적은 여전하다. 이탈리아의 키안티부터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까지, 모두 길 위에 뿌려진 씨앗의 후예다.
로마 제국은 무너졌지만, 그 길 위의 와인 씨앗은 영원히 싹텄다. 효모의 발효와 오크통의 보호가 없었다면, 유럽은 와인 없는 대륙이었을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공헌자들은 제국의 영광을 넘어, 와인을 인류의 공유 유산으로 만들었다.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포도밭으로 이어지며, 한 잔의 와인에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