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출간된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강렬한 문제작 중 하나로 기억된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압축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12편의 연작소설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 삶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소주가 있었다.
소주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유일한 위안이자, 잔혹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마취제이며, 동시에 그들의 비참함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이다. 난쟁이 아버지가 마시는 소주 한 잔, 공장 노동자들이 돌려 마시는 소주병, 철거민들이 절망 속에서 들이키는 소주—이 모든 장면들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된 사람들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1970년대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도시 빈민, 공장 노동자, 철거민들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 소주는 대중적 술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값싸고 도수가 높은 희석식 소주는 힘든 노동 후 피로를 잊게 해주는 서민들의 친구였다.
조세희는 바로 이 소주를 통해 시대의 모순을 포착한다. 소주는 작품 속에서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호다. 양주나 맥주가 아닌 소주를 마신다는 것은 곧 사회적 위치를 말해준다. 둘째, 소주는 현실 도피의 수단이다. 견딜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소주로 감각을 마비시킨다. 셋째, 소주는 연대의 매개체다. 가난한 이들은 소주를 나누며 서로의 고통을 위로한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난쟁이 아버지는 키 작은 노동자다. 그는 은강 노동자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지만, 그의 노동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난쟁이 아버지가 마시는 소주는 축배가 아니라 한숨이다.
"아버지는 소주를 마셨다. 작은 손으로 소주잔을 들고,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이 장면에서 소주는 즐거움이 아니라 무감각의 상징이다. 아버지는 소주를 마시며 하루의 고단함을 잊으려 하지만, 그 소주잔은 오히려 그의 비참함을 더욱 부각한다. 작은 손으로 든 소주잔은 그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난쟁이 아버지에게 소주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품이다. 그것은 내일을 살아갈 힘을 주는 동시에, 오늘의 절망을 확인시키는 이중적 존재다. 소주 한 잔에도 망설이는 그의 모습은 1970년대 도시 빈민의 경제적 궁핍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작품 속 공장 노동자들에게 소주는 연대의 상징이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들은 퇴근 후 소주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한다. 영호, 영수 남매가 일하는 공장 장면들은 이러한 노동자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공장 앞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한 병을 돌려 마시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을 나눴다."
여기서 소주는 개인적 음료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례의 도구다. 한 병을 돌려 마신다는 행위는 경제적 궁핍(각자 한 병씩 살 여유가 없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연대를 상징한다. 소주잔을 돌리는 행위는 고통을 나누고 위로를 주고받는 의식이 된다.
하지만 이 연대는 한계를 갖는다. 소주로 얻는 위안은 일시적이며,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다음 날 아침이면 그들은 다시 착취적 노동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주는 현실을 잊게 해 주지만,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작품의 핵심 갈등인 철거 장면에서 소주는 절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행복동 철거민들은 강제 철거 앞에서 무력하다. 그들이 마시는 소주는 저항의 술이 아니라 체념의 술이다.
"철거 전날 밤, 동네 사람들은 모여 소주를 마셨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소주잔만 오갔다."
이 장면에서 소주는 언어를 대신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무력감이 소주잔을 통해 전달된다. 침묵 속에서 오가는 소주잔은 공동체의 마지막 의례이자, 패배의 확인이다.
난쟁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들이 마시는 소주는 더욱 비극적이다. 그것은 애도의 술이자, 생존자의 죄책감을 담은 술이다. 소주는 죽은 자를 기리는 제주(祭酒)가 되지만, 동시에 산 자들이 계속 살아가야 하는 잔인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조세희는 소주를 통해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소주를 마시는 사람과 마시지 않는 사람, 소주를 마시는 장소와 방식은 명확한 계급적 차이를 보여준다.
난쟁이 가족과 노동자들은 값싼 소주를 포장마차나 집에서 마신다. 반면 그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와 관료들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소주와는 무관한 공간에 있다. 이러한 대비는 의도적이다. 소주는 가난한 자들의 전유물이며, 그것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위치를 규정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소주가 '선택'이 아니라 '운명'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소주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소주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서 마신다. 이는 그들의 삶 전체가 선택이 아닌 강요된 운명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세희는 소주를 단순한 배경 소재가 아니라 서사의 핵심 요소로 활용한다. 그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소주 장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든다.
"아버지는 소주를 마셨다."
이 짧은 문장은 수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왜 마셨는지, 어떤 기분으로 마셨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단지 '마셨다'는 사실만 제시한다. 이러한 절제된 서술은 독자로 하여금 그 이면의 고통을 상상하게 만든다.
또한 조세희는 소주 장면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압축한다. 소주를 마시는 장면 전후로 인물들의 상황이 급격히 변화하며, 소주는 그 변화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한 가족의 운명이 결정되고, 한 공동체가 해체된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소주는 197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대다수 노동자와 빈민들은 소주로 하루하루를 견딘다.
작품은 소주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들이 소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는 정당한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이 소주 한 병 값도 안 되는 현실은 옳은가? 소주로 고통을 마비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살아가는 것'인가?
조세희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소주잔을 든 난쟁이의 모습을, 공장 앞 포장마차의 풍경을, 철거민들의 마지막 술자리를 냉정하게 묘사할 뿐이다. 그 냉정함 속에 더 깊은 분노와 슬픔이 담겨 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출간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만, 작품 속 소주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퇴근 후 소주로 하루의 피로를 달랜다.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소주는 여전히 가장 가까운 위안이다.
물론 시대는 변했다. 소주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마시는 문화도 달라졌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소주는 여전히 '노동자의 술'이며, 그 안에는 여전히 불평등과 고통이 녹아 있다.
조세희의 작품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단순히 1970년대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소주잔을 든 누군가의 삶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소주잔이 왜 쓸쓸한지, 왜 그들이 소주 없이는 하루를 견디기 어려운지 물어야 한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희망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공을 쏘아 올리기 전, 난쟁이는 소주 한 잔을 마셨으리라는 것이다.
소주는 이 작품에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연대와 고립 사이에 놓인 경계의 술이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이자, 그들의 비참함을 증명하는 증거다.
조세희는 소주잔을 통해 한 시대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누군가의 소주잔이 비어갈 때,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