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08년 인생 첫 크루즈 여행 준비
이 글은 저희 가족이 텐진에서 시작하는 크루즈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제가 출장등으로 방문을 해본 베이징(북경)을 가족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워밍업 여행을 한 내용 중 2편입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진했습니다.
표지 사진은 The Great Wall of China: A Historical Overview | China Travel입니다.
일자 : 2008-9-1 (월)
방문지 : 북경 주변 ( Beijing)
날씨 : 32도, 맑음
북경에서의 이틀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BC 214년에 진시황이 북쪽의 오랑캐들로부터 중국을 보호하기 위해 농민들을 징집해서 만리(약 5천 킬로 미터)에 걸쳐 건설한 군사장벽이다. 달에서 보면 유일하게 보이는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말 웅장하고, 길고, 장엄하다.
홍콩에서 다행히도 구입한 영국인 John Man이라는 중국여행전문가가 2008년에 출판한 “The Great Wall”을 보면, 사실 2003년에 최초의 중국 우주선에 탑승했던 우주인 양 리에는 우주에서 만리장성을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너무 얇게 길고, 색깔도 주변의 나무색과 비슷하여 만리장성을 볼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한다. 또한 만리라는 의미도 중국인은 길다/머다란 뜻이지 정확하게 만리라는 뜻도 아니라 한다.
사실 어떤 구간은 경사가 너무 급해서 일반인이 걷는다 해도 1시간에 1Km를 걷기도 싶지 않는데,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40Km을 약 4시간 내에 주파하고 나머지 시간을 쉰다고 가정하면, 약 125일이 걸리는 거리이며, 하루에 10Km도 못 뛰는 능력을 가진 일반인이라면 매일 걸어도 500일이 걸리는 긴 거리다.
그 길이도 정확히 만리가 아니라 3천~6천 Km로 학설도 다양하다 한다. 어떻게 흙으로 꼬불 꼬불 지어진(높은 곳에서 본다면) 성벽의 길이를 정확히 잴 수가 있겠는가. 아마 중국인 중에도 만리를 전부 걸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어느 구간은 오랜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곳도 많이 있다 한다.
일부 북경지역만 관광용으로 관리될 뿐 아직도 많은 곳이 비와 바람에 무너져 내리고 있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다. 정말 관리에는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걸어서 올라가기도 힘든 경사의 성벽의 경우에는 성벽이 없어도 적들이 올라오기가 힘들어서 공격을 포기할 텐데, 모든 구간을 연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잘 나가던 성격 괴팍한 진시황의 명령)과 전시행정이 많은 양민의 목숨과 삶을 빼앗아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 중 읽었던 유명한 “The Great Wall”에 인용된 Meng Jiangnu 부인의 망부석 민담을 요약해 본다.
삽화는 COPILOT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양쯔 강 주변에 사는 Meng Yuanwai라는 농사꾼 총각과 이웃집에 사는 Jinag 처녀가 결혼을 하여 예쁜 딸을 낳았는데,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이름을 Meng Jiang Nu (Nu는 女, 딸)라 했다. Meng Jiangnu은(“지앙누”라 하자) 예쁘고 총명하게 자라났고, 자수, 회화, 음악, 바둑에 능통했다. 이 무렵은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성은 쌓아 놓으면 무너지고, 다시 쌓아도 무너지는 등 관리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한다.
Zhao Gao라는 탐관오리가 만리 구간을 잘 지으려면 1리마다 산사람을 한 명씩 묻으면 될 거라고 황제에게 추천했고, 만 명의 살은 사람을 생매장하는데 부담을 느낀 관료들은 1명이 1만 명의 역할을 한다고 장안에 소문난 젊은 학자인 Fan Siliang(“씰리앙”이라 하자)을 한 명만 묻으면 된다고 건의하여 그 자를 잡아 오도록 명령했다.
이 사실을 알고 도망치기 시작한 씰리앙은 우연히 지앙 누의 집을 지나게 되었는데, 꽃에서 나비를 잡고 있는 지안 누는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낯선 사람에 대해 아버지에 이야기를 했고, 그 청년의 학식과 외모에 반한 아버지가 씰리앙에게 데릴사위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다.
씰리앙은 자기는 쫓기는 미래가 없는 사람이라 극구 사양하지만 결국 지앙누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리던 중 씰리앙은 잡히게 되고 자신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남긴 체 밧줄에 묶여 생이별을 하게 된다. 슬픔에 잠긴 지안 누는 식음을 전패한 체 잠도 자지 않고 남편을 기다게 된다.
3년이 지나도 남편 소식이 없자 지안 누는 추위 속에서 장성을 쌓는 노역을 하고 있을 남편을 위해 두꺼운 겨울 옷을 전달하기 위해 장성을 향해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어느 지역을 지날 때 경비병들이 통행세를 내라 하고, 무일푼인 그녀가 당황해 하자 그녀의 미모에 반한 한 장교가 험난한 장성 건설 지역에 가지 말고 자신과 결혼하여 살자고 유혹한다. 이에 반항하자 그녀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를 불쌍히 요긴 경비병들이 밤에 그녀가 탈출할 수 있도록 감옥문을 열어주게 된다.
정신없이 도주하던 그녀는 마침내 양지강 근처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제는 강을 건널 갈 방법이 없었다. 하늘에서 옥황상제(Jade Emperor)가 이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두 명의 천사를 보내 지친 그녀를 부축해 강을 건너게 해 주었고, 양탄자를 주었다. 그녀가 양탄자에 앉자 양탄자는 신기하게도 하늘로 올 갔고, 그녀는 장성부근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명의 남자천사가 나타나 아직도 갈길이 멀다 하며 지팡이를 하나 주는데 신기하게도 그 지팡이는 말로 변해 그녀를 높은 산으로 데려다주었다. 마침내 장성 건설지에 도착한 그녀는 사방팔방으로 남편을 찾아 헤매는데, 진실을 말하기 망설이던 사람들은 그녀에게 씰리앙은 잡혀온지 3일 만에 죽음을 당했으니, 바로 돌아가라고 한다.
남편의 사망소식에 지안 누는 울음을 터트리게 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녀의 눈물은 장성을 파이게 했다. 너무 슬퍼 담장에 머리를 찍자 20킬로가 넘는 담장 블록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그녀가 실신하자 꿈에 남편이 나타나 “나는 담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묻혀 있으니, 나의 뼈를 찾으려면 너의 손가락을 물어 그 피를 떨어 뜨면 그중에 피를 먹는 뼈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자신이다”라고 말해 준다.
준비해 간 겨울 옷에 남편의 뼈들을 담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녀에게 자신의 남편을 죽이자고 건의한 Zhao Gao이 나타난다. 건설 수장으로 있는 Zhao Gao는 장성을 파괴한 죄를 물어 그녀를 재판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에 반한 진시황이 자신과 같이 살면 죄를 면해준다고 설득하게 된다. 그녀는 제왕에게 당시의 독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당신과 편하게 살 수 있느냐며 반항한다.
그러나 그녀는 은뚜껑이 달린 금관에 남편의 시신을 담아주고, 모든 관료들이 남편의 죽음에 애도를 표명해 주고, 황제가 직접 장례식에 참석해 주면 결혼하겠다는 단서를 단다. 황제가 승낙하자 하얀 옷을 입은 지안 누는 동해바다 근처에서 그녀의 소원대로 장례를 마친 후, 거친 바다로 뛰어 숨을 거둔다. 이날 바다에서는 용머리를 한 큰 바위기 하나 생겼고 사람들은 이를 그녀의 무덤이라고 여기고 지금도 비운의 미망인인 지앙 누를 기린다고 한다.
우리는 자동차로 만리장성 일대를 먼저 둘러본 후, 댐을 건설하다가 만들어진 용경협에 먼저 들렀다. 댐건설에 반대했던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진 용경협은 말 그대로 인공적으로 산주변에 물을 가두어 만들어진 공원으로 작은 배를 타고 경치를 둘러보는 곳이다. 경치가 천하일품이라는 장가개에 가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관광하는 미니코스 거나 미니어처로, 중간중간에 하선을 해서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우리는 점심을 용경협 입구에 있는 초라해 보이는 식당에서 용경협에서 잡은 산천어 구이와 산에서 직접 구한 버섯을 넣은 닭고기 탕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아이들은 그릇이 지저분하다고 많이 먹지를 못했는데, 사실 산천어는 한국에서도 먹어 보기가 쉽지 않은 요리라 나와 집사람은 포식을 했다.
우리 차가 떠날 때까지 식당입구에 나와서 손을 흔들어 주던 한국 어디선가 본듯한 식당주인아저씨의 모습이 선하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만리장성 일부 구간을 왕복여행을 하는 속성코스를 선택했다. 케이블카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서, 중국인들은 온 가족이 도시락을 가지고 하루코스로 특정 구간을 등정하는 편이라 한다.
우리는 케이블카에서 내려 약 5백 미터 정도를 올라서 사진만 한방 찍고 오는 정도의 여행을 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산등성을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시간이 난다 해도 솔직히 이 정도만 보고 싶다.
다소 피곤했지만 우리는 명나라 13 왕묘를 관광했다. 아직도 무덤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개발 중이며, 일반인의 출입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제한적이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개방하고 있는 13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정릉(定陵)을 방문했다. 우연히도 定은 본인의 이름한자이고, 왕비인 孝는 집사람 이름의 한자이다. 정말 우연치고는 신기한 우연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우연이다", "신기하다"정도로 만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이 글을 정리하면서 중국이 만든 chatGPT이자 이미지를 읽을 수 있는 DeepSeek에게 정식으로 질문을 했다.
몇 년 전에 베이징 만리장성을 방문했을 때 비석을 봤었는데, 제 이름의 한자인 정(定)이 들어간 황제, 집사람의 효(孝)가 들어간 왕비를 언급한 비석이 있어 사진을 찍었는데, 해석과 두 인물에 대한 내용도 상세히 설명해 주세요. 아마도 저와 집사람의 전생의 인물 같아서요...
정릉(定陵) 소개
정릉은 **명나라 13대 황제 만력제(神宗, 주역균, 1563~1620)**와 그의 두 황후인 효단황후(孝端), **효정황후(孝靖)**의 합장릉입니다. 중국에서 최초로 국가 주도로 과학적 발굴이 이루어진 황실 무덤으로 유명합니다.
⏳ 역사적 배경
건축 기간: 1584년 시작 ~ 1590년 완공 (명나라 만력 연간)
특징: 화려한 석조 건축물, 지하 궁전 형태로 설계
보존 상태: 400년이 넘었지만 명루(明樓), 보성(寶城), 릉문(陵門) 등이 잘 보존됨
� 주요 인물 정보
1️⃣ 만력제 (주역균, 神宗)
재위 기간: 1572~1620년 (48년, 명나라 최장 재위)
특징: 어린 나이(9세)에 즉위, 장기 집권하며 명나라 쇠퇴기의 시작을 맞이함 말년에는 정사를 소홀히 해 "만력 봉황"이라 불리며 비판받음 정릉은 그가 생전에 직접 조성한 묘소
(특이하게도 "재위기간"의 숫자중, 집사람의 전호번호에는 57이라는 숫자가 있고, 저는 62년 생이다, 또 황제 사망일에는 집사람 출생년도인 63, 저의 출생연도인 62라는 숫자가 있다.)
2️⃣ 효단황후 (孝端, 왕 씨)
정실 황후로 만력제와 함께 정릉에 합장
성품: 현명하고 검소함으로 명성이 높았음
슬하: 자녀 없음
3️⃣ 효정황후 (孝靖, 왕공영)
원래 후궁이었으나 아들(태창제)이 황제가 되면서 추존됨
특이점: 사후에 황후로 격상되어 정릉에 합장
�️ 정릉의 중요성
과학적 발굴: 1956~1958년 중국 정부 주도로 체계적 조사
출토 유물: 금관, 봉관, 비단 의복 등 3,000여 점
역사적 가치: 명나라 후기 정치·경제·문화 연구의 핵심 자료
✨ 특별한 연관성
사용자님의 이름 '정(定)' → 정릉(定陵)과 한자 동일
부인의 이름 '효정(孝定)' → 효정 황후와 한자 동일
정말 신기하죠?
도굴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석은 크게 건설했으나 무덤은 입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따로 봉분을 하지 않고 풀과 나무를 심은 언덕 밑에 안장을 하였기 때문에 도굴전문가가 많은 일본인들도 찾아내지 못했다 한다. 봉분은 6년여에 걸쳐지어 졌고, 3천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 한다. 정말 무덤의 벽들은 석재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틈새가 너무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어 아직도 비가 샌 적이 없다 한다.
유적뿐만 이니라 정말 중국인들의 석재 가공기술은 대단한 것 같다. 틈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과거 보도블록 공사와 같이 함몰이 되어 있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점심을 늦게 북경오리 등으로 한 관계로 저녁은 생략하기로 했다. 아이들을 적정하는 가이드의 안내로 호텔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컵라면과 맥주등을 사서, 호텔방에서 먹으면서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