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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스피아 Aug 10. 2021

노벨상 수상작가의 쓸모없는 책

쓸모없음의 쓸모 : 비워둔 자리에도 말은 찬다




 '쓸모'가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무엇을 배우든지 무엇을 읽든지 곧장 무엇에 쓸모가 있는지를 떠올려야만 합니다.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뭐든요.


 한때 스스로의 쓸모를 위해 자기계발서들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성공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작은 습관'들의 중요성을 강조한 어느 자기계발서에서 제가 밑줄을 치며 읽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구절은 "리프레시를 위해 어떤 분야의 책이든 하루에 한장(chapter)씩 읽기"였습니다. 썩 괜찮은 제안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포스트잇에 붙여뒀는데 하루만에 떼어버렸습니다. 이유는 당시 읽고 있던 책이 <아빠의 아빠가 됐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점심먹고 둔한 내장과 머리를 깨우겠다는 정도의 쓸모로 동료 시민의 고뇌를 해치울 순 없었습니다. 


 쓸모를 강조하는 책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떤 실용적인 책은 특정 국면에서 발군의 쓸모를 발휘합니다.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때마침 옆에 놓여있던 1000페이지짜리 하드커버 법전이라든8지 라면받침 판형으로 출시된 책이라든지 뭐 그런거요.


 이번 레터에선 폴란드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쓸모없는' 서평집 하나를 펼치며 이 '쓸모'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달력에 대한 서평(365페이지. 특징: 잘 찢어짐)


  우리나라에선 다소 낯설 수 있는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가 쓴 서평집의 제목이  <읽거나 말거나> 말거나입니다. 제가 쉼보르스카를 좋아하고, 이 책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을 여러번 주위에 추천을 해ㅏ왔습니다만. 매번 추천을 할 때마다 <읽든지 말든지> <읽든가 말든가> <읽던지 말던지> 등으로 제목을 틀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제목으로 추천을 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여하간 어떤 이름으로 추천을 하든 곧장 "지금 나를 놀리느냐"는 표정을 마주할 수 있는데요. 읽기를 강력 추천한다는 책의 제목이 <읽거나 말거나>라는 것은 역시 조금 곤란하긴 합니다. 


 처음 이 책을 서점에서 집어들었을 때의 걱정이 아직도 뇌리에 선합니다. '과연 폴란드의, 1970년대에 쓰여진 '서평집'이 무슨 쓸모란 말인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서평집을 읽는 이유는 서평집을 읽고 난 뒤 마음에 들어온 책을 골라 독서를 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폴란드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이 많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1970년대쯤 쓰여진 서평집이라면 더더욱 만약 그 서평집을 읽고나서 너무 읽고 싶은 책이 생겼는데 그 책이 국내 번역이 되어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쯤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왜냐면 이 책에 나온 책들 중에 읽고 싶은 책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서평집으로서 얼마나 쓸모 없는 처사인가요! 


 예를 들어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쓸모없는 서평을 꼽자면 역시 '1973년 달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네, 여러분이 떠올리실 바로 그 달력입니다. 365페이지이고, 365일 동안 하루에 한장씩 소멸되기 위해 만들어진 '책'말입니다. 




쓸모없음의 쓸모 : 비워둔 자리에도 말은 찬다. 



 달력에 대해서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이 대체 무슨 서평을 썼는지 혹시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달력에서 한 구석엔 레시피 따위와 철학자의 명문이 공존하는 혼종적(?) 텍스트로서의 달력을 그려냅니다.  


달력에는 모든 게 조금씩 다들어있다. 주어진 날짜에 해당하는 역사적 기념일, 각운을 맞춘 간단한 시구, 금언, 재담, 통계정보라든지 수수께끼, 흡연을 향한 경고, 집안에서 해충을 박멸하기 위한 방법 등등. 이처럼 달력에는 모든 요소들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고 서로 불협화음을 이룬다. 역사의 장엄함과 평범한 날의 사소함이 공존하고, 철학자의 명문은 일기예보와 경쟁하며, 클레멘티나 숙모가 알려준 유용한 생활정보의 바로 옆에서 영웅의 일대기가 잘난척하며 경쟁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방'을 떠올렸는데요. 마침 글을 쓰면서 올려보다보니 갖은 기사 링크와 함께 나중에 읽기 위한 벽돌책의 서평 바로 위엔 어제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의 아이디 비밀번호, 그리고 그 위엔 회사식당 이번주 식단표 캡처사진이 섞여있습니다. '잊고자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덧없는 저항의 흔적입니다. 그는 1973년 달력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2021년의 지구 반대편의 한 사람이 그 서평의 진지한 독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 밖에도 그는 유행에 따라 양산된 실용서들도 가차없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예를들면 수상한 동아시아의 요리에 대한 책과 DIY에 대한 실용서적 등입니다. 하나하나 읽으면서 마치 동시대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끊임없이 킥킥댔는데요. 짧게 옮겨보겠습니다. 


 먼지가 뒤덮인 난장판 속에서 절망과 후회를 거듭하며 최소 일주일의 시간이 흘러간다[...]두번째 방을 도배할 땐 당연히 첫번째방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두번째 방을 소유한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하지만 여기서 절대로 복구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으니 바로 돈주고도 살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일부가 그것이다. 도배 작업을 완료한 대신 우리는 지치고 피곤하고 우울해진다. 공적이고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우리는 철저히 방치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전 생애가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하루, 또 하루 이렇게."

- 얀 보옌스키 <아파트 도배하기>(1976) 

 

 그리고 보통 '여름휴가' 추천서적이라고 하면 판타지 소설이나 가벼운 책들이 소개되기 마련인데, 그는 정반대로 정말 무거운 본격 학술 서적(그러면서도 '직업적 필요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즉 쓸모없는) 이야말로 여름휴가를 위한 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정도의 어려움은 분명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직업적인 필요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세상의 신비에 대해 놀라며 감탄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되는 여름휴가 때라면 더욱 그러하다. 저자인 템브록과 세명의 역자 덕분에 우리는 잔디밭에서 찍찍거리는 게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는지, 또한 그 목적은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권터 템브록 <동물의 음성-생체음향학 입문> 


  훌륭하신 번역자분은 마지막 역자 후기에 '쉼보르스카는 어떤 책이 안좋은지를 적으면서 우리에게 나쁜 책을 고르는 안목을 선사한다'고 적었습니다. 네, 물론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저는 굳이 그런식으로 이 책의 쓸모를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냥 쉼보르스카는 쓸모 없는 것을 그 자체로 즐길 줄 아는, 호기심 왕성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쓸모가 없어도 혹은 정확히 그 이유로 충분히 이 책은 흥미로웠습니다.   




 맺음말


  최근에 알게 된 재미난 트위터 계정 하나가 있는데요. 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레터의 끝을 맺고자 합니다. 이 트위터 계정의 이름은 "오늘이 테드 댄슨의 생일인가요?Is Today Ted Danson's Birthday?"(https://twitter.com/teddansonbday)입니다. 테드 댄슨은 미국의 CSI 시리즈 등에 출연한 유명 배우로, 우리나라로 치면 "오늘이 송강호 생일인가요?"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계정은 매일 멘션을 날리는데 1년 365일 중 364일의 멘션은 당연히 "오늘은 테드 댄슨의 생일이 아닙니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딱 하루, "오늘은 테드 댄슨의 생일입니다"라는 멘션이 뜨는데 이 단순무고한 계정의 팔로워는 무려 2.7만명에 달합니다.이 계정은 하나의 밈이되어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올라오는 똑같은 멘션을 리트윗하면서 즐깁니다. 


 

 그 쓸모없음의 축제 속에서 마치 그들은 매일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테드 댄슨의 생일이 아니예요. (그리고 설령 생일이라고 해봤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당신과 나, 우리는 모두 오늘이 '쓸모 없는' 날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럴지라도 웃고 떠들고 즐길거예요. 그게 우리가 인생을 사는 방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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