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4일 (금) / 32일 차
2021년 5월 14일, 금요일 (32일차) Endless
강정 숙소 → 봉주르 마담 (★★★)
→ 연돈 볼카츠 (★★★★★) → 퍼시픽랜드 돌고래쇼
→ 새별오름 / 카페 새별 → 한옥집 (김치찌개 ★★★★)
밤 11시 30분, 법환포구 인근.
오늘도 비오는 밤이다.
비 내리는 와중에도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라디오에서 흐르는 곡은
플라워의 ‘Endless’라는 곡이다.
학창시절 참 좋아했던 노래다.
파도 소리와 빗소리,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까지
삼박자가 듣기 좋게 화음을 이룬다.
그리고 많은 생각들이 스쳐간다.
짧은 하루 중, 유일하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이 좋은 걸 떠나기 며칠 전에 알았다. 또 아쉽다.
오늘은 아내에게 참 미안한 하루였다.
왜 그랬을까?
아내는 지난 번 한림에서 다툰 뒤로 많이 달라졌다.
내가 속이 좁게 삐지고 투정 부려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날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
이전 같았으면 같이 화를 냈을텐데
너그럽게 내 투정을 받아주니. 괜히 부끄러웠다.
발단은 퍼시픽랜드 돌고래쇼였다.
지난번 돌고래 투어때 짧게 스치듯 돌고래를 본 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예약해서 공연을 보러 갔다.
기왕 아이들을 위해
앞자리에 앉혀주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좌석이 두 칸씩 떨어져 앉게 되어 있었다.
한 칸 씩 떨어지면 괜찮겠지 싶어서 앉았다가
직원 분에게 한 소리를 듣고 밀려났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더 좋은 자리에
앉아서 보게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거라 그순간 짜증이 났다.
더구나 조금 일찍 들어와 줄 서서 기다릴 걸...
아내에게 투정도 부렸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속 좁은 나란 인간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는 중이다.
강정 숙소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중문에
그 유명한 돈까스집 연돈이 있다.
아내는 서울로 돌아가기 전,
꼭 돈까스 맛을 보고 싶다며
저녁 8시마다 테이블링에서 예약을 기다렸다.
일주일 째 번번이 실패했는데,
정말 10초도 안 되는 순간에 마감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손이 빠르나.
그래서 오늘은 연돈에서 얼마 전부터 테이크 아웃용으로
판매를 시작한 볼카츠(고로케)를 구입했다.
소문대로 대단한 맛이다.
바삭바삭한 겉에 촉촉하게 간이 밴 고기가 굉장히 맛났다.
게다가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유명세를 탄 사장님이
직접 포장해 계산을 해주는 팬 서비스를 해서 더 기분이 좋았다.
제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한 가족들이 많았는데,
저 분들은 어떻게 예약을 했을지 대단해 보였다.
기필코, 가기 전에는 꼭 맛을 봐야지!
마침 오늘은 우리 일정을 이틀 연기했다.
예매했던 것보다 값싼 비행기표가 나와서
이틀 연기했고, 다행히 차량 탑재가 가능한
선박도 연기가 가능했다.
뭔가 보너스판을 얻은 기분이랄까. 목표가 생겼다.
열심히 도전해서,
가기 전에 꼭 연돈 돈까스를 먹어봐야지!
퍼시픽 랜드에서 돌고래 공연을 보고
시간이 남아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작년 이맘쯤 이른 아침에 가서
안개낀 새별오름을 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는 아이들이 지금보다 어렸고,
안개 낀 오름 중턱까지 첫째를 안고 올랐다.
새별카페에서 바라본 오름은 오늘도 멋졌다.
비록 날은 약간 흐렸지만, 정상까지 오르는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아내에게 미안해 오름에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아내는 제주에 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거의 보낸 적이 없는데...
난 아내에게 해준게 없다.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아내에게 언제나 미안하다.
우리, 3년만 잘 버텨보자!
새별오름은 다른 오름과 달리 민둥산이 특징이다.
들불로 삼림을 다 태웠다. 왜 그렇게
오름에 불을 내는 지 모르겠지만
민둥 오름인 모습에 조금은 다른 색을 가졌다.
제주에는 많은 오름이 있다.
차로 오를 수 있는 군산오름에 올랐을 때는 아이들에게
멋진 제주 남해안 풍경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새별오름은 정상에는 못 가봤지만
우리 가족이 기억하는 제주의 첫 오름이다.
아이들이 다리 힘이 더 강해지면,
제주의 멋진 오름 곳곳을 올라봐야겠다.
제주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제주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멋진 공간들이 참 많다.
잠깐 회사 소식이 들렸다.
모던 코리아를 제작했던 선배들이
백상예술대상 교양부문
수상을 했다는 기쁜 소식이다.
한 분야를 개척하니 좋은 소식도 뒤따른다.
나는 돌아가면 어떤 프로그램을 할까?
잘 할 수 있는 분야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분야는 다르다.
10년차인 나는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을
조금씩 개척해 나가야할텐데 조금은 부담이다.
<오느른>을 만들고 있는 MBC 별PD는
시골집을 사서 훌륭한 리틀 포레스트를 찍고 있다.
멋지고 부러웠다.
영상을 볼 때마다 그녀가 갖는 일의 즐거움이 느껴진다.
나는 어쩌면 이번 제주살이를 통해 얻은
가족이라는 의미. 아이들을 키우는 초보 파파의
좌충우돌 노하우를 전수하면 어떨까?
약간 내 경험에서 우러나는 프로그램의 변주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그래도 감수성은 뒤지지 않는데...
한편의 시를 닮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보너스판을 얻은 덕에
제주에서의 시간이 닷새 남았다.
남은 날 동안 뭘하고 가면 좋을까.
아이들과의 추억을 더 쌓을까?
아니면, 다음을 기약하며
제주에서 하고 싶은 리스트를 더 만들어 볼까?
매일 밤 마셨던 술을 조금은 줄이고,
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더 가져야지.
나의 가족, 아이들, 프로그램, 꿈, 시와 음악,
그리고 삶의 철학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들을 하루에 조금씩 만들어봐야겠다.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일상에서
조금은 과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늘 기분 좋은 하루였으니.
한 편의 시 같다!
오늘 일기를 마치고 돌아갈 시간이 벌써 33일차다.
이렇게 아쉬운 하루가 또 간다!